토호는 조선시대 향촌에 토착한 재지세력이다. 조선 전기 토호는 고려시대의 향리에서 분화된 양반 지주층에 해당한다. 이들은 유향소를 조직하여 자치적인 향촌 지배 질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수취 기반을 불법적으로 침탈하면서 관과 대립하는 모습도 확인된다. 조선 후기 토호는 유향분기 이후 일반적으로 사족층을 일컫는다. 이들은 정국 변화에 따라서 중앙집권세력과 결탁하거나 향촌의 재지세력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문이나 가세(家勢)를 기반으로 스스로 향촌을 운영하거나, 수령 및 향리, 향임(鄕任)과 결탁하여 이익을 챙겼다.
조선시대 토호는 정치 · 사회적 입장에서 호강(豪强), 호우(豪右), 호호(豪戶), 강호(强戶), 호족(豪族), 호협(豪俠), 세가(勢家), 거실(巨室), 반호(班戶) 등 다양한 표현으로 불렸다.
경제적 측면에서 향곡부호(鄕曲富豪), 향족호부(鄕族豪富), 호부지류(豪富之類), 부강토호(富强土豪) 등으로도 불렸다. 이들은 국가의 수취 기반을 불법적으로 침탈하면서 토지 겸병, 삼정(三政) 문란, 조세 거부, 사시악형(私施惡刑), 잡기편재(雜技騙財) 등 각종 폐단을 야기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감사(監司)에게 이들을 징치(懲治)하도록 하였다. 또한, 1654년(효종 5)부터 삼남에 영장(營將)을 파견하여 토호들이 은닉한 민정(民丁)을 속오군(束伍軍)에 편성토록 하고, 토호들의 동태를 감시하거나 그들의 변란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그 밖에도 대원군의 전면적인 서원철폐 정책을 통해서 토호들의 사회 · 정치적 기반을 제거하거나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방법 등이 시행되었다.
조선 전기의 토호는 고려시대의 향리 계급에서 과거(科擧), 군공(軍功), 첨설직(添設職) 등을 통해 사환(仕宦)했던 전 · 현직 관료 및 품계를 받은 품관(品官)들로서 양반 지주층에 해당한다.
이들은 향촌 사회의 지배층으로서 유향소(留鄕所)를 조직하여 그 지역 출신 재경 관료들의 조직인 경재소(京在所)와 상호 연계를 가지면서 자치적인 향촌 지배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향약(鄕約) · 동약(洞約) 등의 기구와 조직을 통하여 향촌 사회를 지배하고 안정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가의 수취 기반을 불법적으로 침탈하는 토호의 무단행위(武斷行爲)가 자주 지적되듯이 관권(官權)에 대립적인 존재였다. 이들은 양정(良丁)을 불법 점유하고 민전을 겸병하며, 환곡을 갚지 않고 군적(軍籍)에서 빠지며 부역(賦役)에도 응하지 않았다.
또한, 공채(公債)를 제때 상환하지 않고, 천택(川澤)의 이익을 독점하거나 관비(官婢)나 여기(女妓)를 취하는 등 더욱 무단행위가 심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령과의 대립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감사나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문죄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조정에서는 관의 행정에 저항하는 부류를 호강(豪强)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제재하기 위한 논의를 본격화하였다.
그 결과 1543년(중종 38) 간행된 『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의 형전(刑典) 잡령(雜令)에는 “호강한 품관이 향곡(鄕曲)을 무단하여 백성을 침학(侵虐)하는 데에도 관리가 막지 못하는 경우에는 적발하고 신문하여 전가사변(全家徙邊)에 처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토호들이 중앙의 관료들에게 온갖 방법으로 청탁을 하였으므로 실제 토호의 무리로 지목되어 처벌을 받아도 형식적으로만 수감될 뿐 죄가 확정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토호들의 강성함이 더해져서 관에 호소하는 자에게 사형(私刑)을 행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이들을 두려워하여 관의 조사에도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
한편,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정에서는 토호를 감관(監官)으로 삼아서 군사를 모집하였다. 전란 직후 수령이 도망하고 관군이 흩어졌으므로 이들을 모집하는 데 향촌 사회를 주도해왔던 토호들의 힘을 빌렸던 것이다. 나아가 경상도에서는 토호들이 군사를 모집하여 의병 운동을 전개하였다.
17세기 이래로 향촌 사회에서 양반이 사족(士族)과 향족(鄕族)으로 나눠지면서[儒鄕分岐] 품관은 향족을 칭하며, 사족보다 한 등급 낮은 양반으로 간주되었다. 조선 후기 토호는 유향분기 이후 일반적으로 사족을 일컫는다.
조선 후기 토호는 대부분 양반 사족들이었으므로 양반토호(兩班土豪) 내지 반호(班戶)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17세기 중반 이래로 당쟁이 심화되면서 정국 변화에 따라 영향을 받았다. 즉, 집권세력의 변화에 따라 상대세력은 사환도 제한되고 토호로 지칭되어 향촌 활동을 견제받았다.
그 결과 18세기 이래로 노론이 집권하면서 토호는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노론 세력과 결탁해 국가 권력의 비호 아래 향촌 사회에 군림하던 세력으로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의 토호들이다.
다른 하나는 중앙 진출이 좌절되면서 집권 세력의 견제 아래 향촌 사회에 토착화한 세력으로 주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토호이다. 이들 모두 향촌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졌지만 향촌 활동을 하는데 관의 협조와 견제에서 차이가 났다. 특히, 후자의 경우 사족들의 향촌 활동을 토호들의 무단행위로 규정하여 제재하였다.
조선 후기 토호들은 자신의 가문이나 가세(家勢)를 기반으로 스스로 향촌을 운영하면서 서원이나 향교의 세력을 이용하였다. 특히 상호견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할 수령 및 향리, 향임(鄕任)과 결탁하면서 부세수취(賦稅收取) 전반에 대한 무단행위가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이 삼정의 문란이었다. 즉, 아전에게 뇌물을 주어 토지의 등급을 낮추어 세금을 적게 내거나, 토지를 숨겨 탈세하였다.
또한, 군역을 도피한 양민을 자신의 농장 속에 은닉하여 사적으로 부림으로써 군사력의 약화와 국가 재정의 감소를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부족한 군포(軍布)를 메우기 위한 족징 · 인징 등 각종 폐단이 야기되었다. 이 외에도 환곡이 고리대적인 부세제도로 전환하자 받기를 거부하고, 환곡의 납부도 거절하면서 변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조선 전기 이래로 지적되어 온 토지 겸병의 경우 토호들은 대부분 수천 · 수백 결의 토지를 소유하고 자신의 노비와 신역(身役)을 도피한 양 · 천민을 활용하여 지주 경영을 강화하였다. 그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유망(流亡)하거나 토호의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반면,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 곡물시장이 형성되면서 토호들은 많은 이득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더욱 토지 집적과 지대 수탈을 강화하여 소농민의 몰락을 촉진하였지만 반대로 요호(饒戶) · 부민(富民)층이 나타났다.
한편, 지방의 토호 세력은 세도 정권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 실제 1867년(고종 4) 암행어사 토호별단(土豪別單)에 오른 세력 가운데는 세도 가문의 일부 인물들이 토호로 지적되고 있다. 그 밖에도 토호들은 아전들과 결탁하여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을 계방촌(契房村)으로 만들었다.
아전들은 빈약한 마을보다는 부유하고 세력 있는 토호와 결탁하여 그가 거주하는 부촌을 계방촌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계방촌의 주민들은 일정한 금전이나 곡식을 담당 아전에게 납부하면 그보다 부담이 훨씬 큰 환상(還上)의 강제 배당, 민고(民庫), 요역(徭役), 군역(軍役) 등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각종 연호잡역(烟戶雜役)과 군역은 제역촌(除役村)이 아닌 다른 마을 주민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에 큰 병폐를 일으켰다. 그러나 아전들의 좋은 수입처가 되었으므로 계방촌은 더욱 증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