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862년(철종 13) 임술민란에 대한 대책으로 조선왕조 정부가 내린 책문에 답한 삼정개혁책.
개설
변천과 현황
내용
응지삼정소의 논자들은 삼정의 과중한 부담에 대해 양전(量田)의 실시, 도결(都結)의 혁파 등을 통한 결가(結價)의 법정액수 준수 등을 내세웠다. 수취 과정의 문제에 대해서는 민고(民庫), 계방(契房), 도결(都結), 양호(養戶) 등 다양한 방납(防納)·납세(納稅) 조직을 해체하여 조세의 중간 누출을 막고자 했다. 여기에 삼정에 민간을 참여시켜 운영의 효율과 공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이서(吏胥)들의 수를 적정한 수준으로 줄이고 급료를 지급하도록 했다.
제도론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군역에 대해서는 재정적으로 대대적인 사괄(査括) 조치와 함께 동포(洞布)·호포(戶布) 등 균등한 수포 방안을 채택할 것을 요청하였고 제도적으로 다양한 군제쇄신책을 내놓았다. 가장 문제가 심각했던 환곡은 현행 제도를 혁파하고 가호(家戶)나 전결(田結)에서 수취하여 그 재정분을 보전하도록 하였고 사창제(社倉制)와 상평제(常平制)를 부활시켜 본래의 제도를 복원하자고 하였다.
응지삼정소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이정청에서는 삼정 각 부문 별로 대책을 마련하였다. 우선 전정(田政)에 대해서는 양전을 실시하지 않는 대신 각종 규정을 바탕으로 원장부(元帳付)는 물론 면세결(免稅結)에 대해서도 과외징수와 모리행위를 금지하는 등의 조항이 삽입되었다. 군정 부문도 일단 군역 운영의 규정을 준수할 것을 강조하면서 동포를 기존의 개별 첨정(簽丁)과 함께 편의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군제(軍制)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가 없었으나, 환곡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수술을 가하였다. 허류곡(虛留穀)을 탕감하는 한편 균역법을 모델로 파환귀결(罷還歸結), 즉 환곡제를 혁파하고 그 재정분을 토지세를 통해 보전하도록 하였다. 진휼과 비축기능은 항류곡(恒留穀)의 조성을 통해 복원하고자 하였다. 이정청의 개혁안은 결국 철회되었는데, 이는 환곡의 파환귀결에 대한 반발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임술민란을 계기로 촉발된 삼정에 대한 논의는 이후 중장기적인 정책과정에서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대원군 집권기를 거쳐 1894년 갑오개혁에서 상당부분 제도로 실현되기에 이른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임술민란기 부세문제 인식과 삼정개혁의 방향」(송양섭, 『한국사학보』 49, 2012)
- 「철종조의 응지삼정소와 ‘삼정이정책’」(김용섭, 『한국근대농업사연구』 상, 일조각,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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