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철종 13) 삼남 전역에서 일어난 임술민란(壬戌民亂)을 수습하기 위해 조선왕조 정부는 삼정이정청을 설치하는 한편 책문(策問)을 내려 조야의 관료와 지식인에게 삼정 문제에 대한 견해와 해결책을 물었다. 철종의 책문에 응하여 각지에서 올라온 응지삼정소에는 삼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이 개진되었는데 이를 통칭하여 ‘삼정책(三政策)’이라 한다. 삼정책에는 삼정운영 과정에서 나타난 과다한 수취액의 문제, 수취과정 상의 문제, 제도 운영의 문제 등에 대한 다양한 해결방안이 제시되었다. ‘삼정책’의 논의는 삼정이정청의 민란 수습 방안에 선택적으로 수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재정·부세 개혁의 방향을 일정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1862년(철종 13) 경상도 단성과 진주에서 시작된 민란은 삼남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왕조 정부는 민란의 원인을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삼정에 문제가 있다고 파악하고 이에 대한 수습책을 마련하기 위해 5월 26일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였다. 이어 철종은 6월 12일 책문을 내려 조야의 관료 및 지식인에게 삼정 문제에 대한 견해와 해결책을 물었으며 각지에서 올라온 응지삼정소(應旨三政疏)를 토대로 이정청은 윤 8월 19일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을 반포하기에 이른다. 철종의 책문에 대해 응지삼정소를 작성하거나 제출한 사람은 재조 관료부터 재야의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었고 의견도 각양각색이었다.
응지삼정소는 철종이 내린 책문에 답하는 형식이었던 만큼 그 내용도 당시 정부의 삼정 문제에 대한 인식에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응지삼정소」의 내용은 다양했지만 대체로 정규수취액과 별도로 부과되는 각종 과외징수로 인해 나타나는 과중한 부담의 문제, 삼정 운영 과정에서 향촌민과 직접 접촉하는 조세 행정이 통일적 원칙 없이 운영되면서 나타나는 수취 과정의 문제, 그리고 군역과 환곡의 운영이 국방과 진휼이라는 제도적 취지와 괴리된 채 부세·재정적 기능만이 두드러짐으로써 나타나는 제도론(制度論)의 문제로 나눌 수 있다.
응지삼정소의 논자들은 삼정의 과중한 부담에 대해 양전(量田)의 실시, 도결(都結)의 혁파 등을 통한 결가(結價)의 법정액수 준수 등을 내세웠다. 수취 과정의 문제에 대해서는 민고(民庫), 계방(契房), 도결(都結), 양호(養戶) 등 다양한 방납(防納)·납세(納稅) 조직을 해체하여 조세의 중간 누출을 막고자 했다. 여기에 삼정에 민간을 참여시켜 운영의 효율과 공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이서(吏胥)들의 수를 적정한 수준으로 줄이고 급료를 지급하도록 했다.
제도론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군역에 대해서는 재정적으로 대대적인 사괄(査括) 조치와 함께 동포(洞布)·호포(戶布) 등 균등한 수포 방안을 채택할 것을 요청하였고 제도적으로 다양한 군제쇄신책을 내놓았다. 가장 문제가 심각했던 환곡은 현행 제도를 혁파하고 가호(家戶)나 전결(田結)에서 수취하여 그 재정분을 보전하도록 하였고 사창제(社倉制)와 상평제(常平制)를 부활시켜 본래의 제도를 복원하자고 하였다.
응지삼정소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이정청에서는 삼정 각 부문 별로 대책을 마련하였다. 우선 전정(田政)에 대해서는 양전을 실시하지 않는 대신 각종 규정을 바탕으로 원장부(元帳付)는 물론 면세결(免稅結)에 대해서도 과외징수와 모리행위를 금지하는 등의 조항이 삽입되었다. 군정 부문도 일단 군역 운영의 규정을 준수할 것을 강조하면서 동포를 기존의 개별 첨정(簽丁)과 함께 편의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군제(軍制)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가 없었으나, 환곡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수술을 가하였다. 허류곡(虛留穀)을 탕감하는 한편 균역법을 모델로 파환귀결(罷還歸結), 즉 환곡제를 혁파하고 그 재정분을 토지세를 통해 보전하도록 하였다. 진휼과 비축기능은 항류곡(恒留穀)의 조성을 통해 복원하고자 하였다. 이정청의 개혁안은 결국 철회되었는데, 이는 환곡의 파환귀결에 대한 반발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임술민란을 계기로 촉발된 삼정에 대한 논의는 이후 중장기적인 정책과정에서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대원군 집권기를 거쳐 1894년 갑오개혁에서 상당부분 제도로 실현되기에 이른다.
19세기 조선 사회의 안정을 저해하는 중대한 문제임에도 본격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삼정의 문제는 임술민란을 계기로 개혁의 중심과제로 부상하였다. 삼정책의 제기는 당시 삼정 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된 사회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이후 대내외적인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정책으로 시도되거나 실현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삼정책은 당시 지식인들의 삼정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폭넓게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후 갑오개혁으로 이어지는 개혁의 도상에서 부세·재정 문제 해결의 방향을 일정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