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역법 시행 이후 군역이 정액화되고 군액의 충정 및 납부의 단위가 면·리로 확정되어감에 따라, 향촌내부 피역으로 인해 생긴 궐액을 충당하고 군액을 납부하기 위해 마련한 공동소유의 전답이 군역전(軍役田)이다. 이것은 19세기 초반부터 등장하였으며,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한 북부지방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점차 삼남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군역전(軍役田)은 지방의 향촌민들이 ‘군다민소(軍多民少)’ 및 ‘피역(避役)’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군총(軍摠, 군대의 정원규정에 의한 군사의 총수)의 궐액(闕額)에 대처하기 위하여 설치한 전답으로, ‘역근전(役根田)’ 또는 ‘군근전(軍根田)’이라고도 한다. 당시에는 군역의 궐액이 면(面)·리(里) 단위로 대정(代定)되고 있었기 때문에, 향촌민들은 ‘군역전’으로 불리는 농지를 마련하고 경영하여 그 수입으로 궐액이 된 군액의 세(稅)를 수납하였던 것이다.
군역전의 설치는 향촌민들이 조직한 ‘군포계(軍布契)’를 통해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군역전으로 쓰이는 전답은 해당 지역에서 이거(移去)해 나가는 농민의 농지를 받아서[납토(納土)] 활용하기도 하였고, 피역자(避役者)들로부터 농지를 받아서 면·리의 소유로 만들기도 하였다.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다산 정약용도 교생(校生)·군관(軍官) 등으로부터 피역의 대가로 약간의 농지를 기증받아 군역전을 설치하라고 권유하였다. 이러한 관행에 대해 중앙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방 수령에 입장에서는 군현의 운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숙종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던 양역변통(良役變通) 논의 및 양역사정(良役查正) 작업은 영조대 『양역실총(良役實摠)』의 간행과 균역법(均役法)의 실시로 마무리되었다. 이를 통해 중앙정부에서는 역총(役摠)을 정액화하여 중앙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에는 성공하였으나, 이에 반해 지방재정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였다. 이로 인해 지방에서는 점차적으로 ‘사모속(私募屬)’으로 불리는 읍단위의 군액이 늘어나게 되었다. 읍단위의 사모속은 대개 다른 역(役)보다 부담이 가벼웠기 때문에, 사모속의 증가는 곧 양정(良丁)의 감소로 이어져서 ‘군다민소(軍多民少)’로 나타났다.
한편 정부는 『양역실총』의 간행으로 군액을 정액화함과 더불어 ‘이정법(里定法)’을 강화하여 군포(軍布)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정법은 향촌 내에서 발생하는 궐액(闕額)에 대한 파악 및 충정(充定)을 가능한 한 리(里) 자체의 기능에 맡기는 공동책납제의 성격을 가진 제도였다. 이 법은 이미 1711년(숙종 37)에 『양역변통절목』으로 반포된 바 있지만, 각읍 군액의 정액화가 이루어지는 『양역실총』 간행 이후에야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정법이 강조되자 결국 각리(各里)에서는 할당 군액만 채워내면, 관(官)에서는 리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는 양인에 대한 개별 인신 지배라는 군역제의 원칙이 점차 느슨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8세기 후반 이후로 면리를 통한 군역수취를 강조하게 되자, 피역행위 역시 면리단위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당 면리에서 도고(逃故) 등의 궐액이 발생하여 그 액수를 거둘 수 없게 되면 부족분을 면·리 전체에 분배하여 납부시키는 ‘면리 분징(面里分徵)’이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궐액이 급격히 늘어나서 대정(代定)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19세기 전반부터 이러한 관행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군역전(軍役田)’ 또한 이러한 ‘면리 분징’의 일종으로, 면리별 공동납 관행을 이용하여 마을 단위로 ‘계’를 조직하고 농지를 설치하여 군포를 납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군역전의 설치가 특히 널리 보급된 지역은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북부지방이었는데, 이는 점차 삼남지방에까지 확산되었다.
한편 군역전의 경영과 군역세의 수납은 두 가지 방법으로 행해졌다. 하나는 향촌사회가 직접 농지를 경영하여 지대(地代)를 받고 이를 가지고 군역세를 수납하는 방법이었다. 다른 하나는 일정 면적의 농지를 군역 대립자(軍役代立者)에게 주고 이를 통해 ‘경식응역(耕食應役)’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와 같은 군역전은 한말(韓末)까지 지속되다가, 갑오개혁 이후에는 공토(公土)·역둔토(驛屯土)로 흡수되었다.
군역전의 존재와 운영 양상은 조선 후기 국가의 군역 정책의 추이와 군역제 운영의 변동을 살피는데 있어서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군역전은 개별 인신에 대한 직접적인 파악을 원칙으로 하던 군역제가 점차 부세화되고 향촌 내부의 관행에 맡겨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군역전을 통한 이러한 수취 관행은 이후에 동포제(洞布制)를 거쳐서 호포제(戶布制)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개항기의 제도 변화와도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