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역변통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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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후기, 민폐(民弊)의 제1차적 요인인 양역 폐단의 해소를 위해 양역제의 개선과 개혁을 주장하던 여러 논의의 총칭.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조선시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양역변통론은 조선 후기 민폐(民弊)의 제1차적 요인인 양역폐의 해소를 위해 양역제의 개선과 개혁을 주장하던 여러 논의의 총칭이다. 효종 때 일부 관료에 의해 제기된 이래 숙종 때 이르러서는 재야의 유생들까지 의견을 제시할 정도로 활발해졌다. 수년에 걸친 논의 끝에 1750년(영조 26) 균역법의 시행으로 일단락되었다.

목차
정의
조선 후기, 민폐(民弊)의 제1차적 요인인 양역 폐단의 해소를 위해 양역제의 개선과 개혁을 주장하던 여러 논의의 총칭.
내용

그동안 제시된 각양각색의 변통론은 수십 종을 헤아릴 정도로 다양하지만, 양역제의 존속 여부를 기준으로 할 때 소변통론(小變通論)과 대변통론(大變通論)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소변통론은 양역폐 발생의 직접 원인이 양정(良丁)의 부족과 양역제의 불합리한 운영에 있다고 보고 이것의 해소에 목표를 둔 것이었다.

여기에는 다음의 세 가지 방안이 있다. 우선 양정 부족의 타개를 위해 양역 부과 대상에서 불법적으로 빠져나간 피역자나 헐역투속자(歇役投屬者)를 적발 · 색출하려는 구체적인 여러 방법인 ‘한정수괄론(閑丁搜括論), 사모속폐지론(私冒屬廢止論), 교생 · 군관태정론(校生 · 軍官汰定論), 군역정액론(軍役定額論)’이 있다. 다음으로, 아예 군사의 수를 줄여 군사비를 절약하는 동시에 줄어든 만큼의 인원을 양정으로 돌려 당장의 양정 부족에 숨통을 틔우자는 의견인 ‘감군액론(減軍額論), 군문혁파론(軍門革罷論), 감진보 · 병주현론(減鎭堡 · 倂州縣論), 경비재감론(經費裁減論)’이 있다. 그리고 양역 부담자의 도망이나 사망으로 인한 빈자리의 보충을 보다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유능한 관리의 파견이나 향촌 자치 조직의 활용과 같은 양역제 운영상의 합리적 개선을 도모하는 방안인 ‘군아문직정금지론(軍 · 衙門直定禁止論), 도고이정론(逃故里定論), 군정민호균제론(軍丁民戶均齊論), 택수령론(擇守令論)’ 등이 있다.

이들 방안은 모두 종래의 양역제도 범위 안에서 폐단의 시정이나 문제 해결을 꾀하는 방향이었다. 그러므로 큰 준비나 별다른 반발 없이 당장 실시가 가능하다는 이점을 가졌고 실제로도 정책에 반영되는 비율이 높았다. 그러나 애초부터 고식적인 방법에 불과했기에 성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대변통론에는 신분을 반영하는 인정(人丁) 대신 가호(家戶) 단위로 수취하자는 호포론(戶布論)과 신분의 구별 없이 일정한 연령층의 모든 남녀에게서 일정량의 포나 돈을 징수하자는 구전(포)론(口錢布論), 양역에서 빠져 한유(閑遊)하고 있는 피역 양민은 물론 양반 · 유생에게까지 징수의 대상을 확대하자는 유포론(遊布論), 그리고 토지로 부과 대상을 아예 옮겨서 국가 재정에서 필요로 하는 양만큼 징수하자는 결포(전)론(結布錢論) 등 4가지가 있었다. 이들은 징수의 대상을 가호 · 인구 · 한유자 · 토지로 각기 달리했지만 양정만을 대상으로 하던 양역보다는 범위를 훨씬 확대시킨 것이었다.

본래 대변통론을 주장하던 논자들은 양역폐의 보다 깊은 원인이 양반층의 양역 거부에 있다고 보았다. 양반이 양역을 지지 않기 때문에 양반이 아닌 자들까지 양역에서 빠지려는 피역 현상이 일어나고 결국 양정 부족을 초래해 양역폐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역폐의 근본적 해결은 양반층에게서의 수취밖에는 없다고 보았다. 호포 · 구전 · 유포 · 결포의 여러 형태는 단지 어떻게 하면 사족에게 신분적 우월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징수하느냐 하는 방법상의 차이에 불과하였다. 여러 사람에 의해 중단 없이 제기된 이러한 양역변통론은 그때마다 조정의 논란과 검토를 거쳤다.

그러나 숙종 말에 이르러 내려진 결론은 당시의 실정으로서는 부분적인 소변통 외에는 어떠한 대변통책도 양반층의 반대로 인해 실시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새로운 형태로 당시 2필이던 양역 부담을 반 정도로 줄여 보자는 감필론(減疋論)이 대두한다. 이것은 양역민의 현실적 부담을 반감시켜주는 혜택은 있지만, 문제는 그만큼 줄어들 양역 재정을 어떻게 보충하는가에 있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차제에 군사의 수를 줄이거나 군문을 혁파하는 등의 소변통책과 감필책의 병행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 부족한 양만큼을 채우기 위해 변형된 형태의 호포 · 구전 · 결포(전) · 유포론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중에서 특히 유력했던 방안은 소변통론의 여러 방법에 의한 군사비 지출의 감축과 토지에 약간의 부가세를 붙이는 방식의 결전론이었다.

주로 영조 전반기에 계속 검토된 여러 방법에 대한 결과는 1750년(영조 26)에 이르러 임금의 일방적인 감필 명령과 함께, 군사 및 군사비 감축과 새로운 수세원(收稅源)으로 어염세나 은여결세의 확보, 유포론의 변형인 선무군관포의 징수, 그리고 1결당 결미(結米) 2두(錢 5錢)의 징수를 내용으로 한 균역법으로 결론을 맺었다. 균역법 시행 과정에서 전개된 공 · 사에 대한 논의는 당시 균역법이 지향하는 재정 이념을 보여 준다. 공(公)은 '균(均)'으로 표현되면서 공평을 표방했을 뿐 아니라 '공용(公用)', '국용(國用)' 등으로 표현되어 공공성을 의미했다. 반면 사(私)는 '사용(私用)', '사문(私門)' 등으로 표현되어 공용 혹은 국용화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와 같은 공 · 사의 논리를 바탕으로 균역법의 시행과 급대 재원의 확보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약 1세기 가까이 진행되던 양역변통 논의도 우선은 일단락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만기요람(萬機要覽)』(군정·재정편)
『균역사실(均役事實)』

단행본

논문

김용섭, 「조선후기의 부세제도이정책(賦稅制度釐正策)」(『증보판 한국근대농업사연구』 상, 일조각, 1988)
이근호, 「영조대 균역법 시행과 공(公), 사(私) 논의」(『대동문화연구』 76,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대동문화연구원, 2011)
정만조, 「조선후기의 양역변통논의(良役變通論議)에 대한 검토」(『동대논총』 7, 동덕여자대학교, 1977)
정만조, 「숙종조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의 전개와 양역(良役)대책」(『국사관논총』 17, 국사편찬위원회, 1990)
정연식, 『조선후기 역총(役摠)의 운영과 양역변통(良役變通)』(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차문섭, 「임란 이후의 양역(良役)과 균역법(均役法)의 성립」(『사학연구』 10·11, 한국사학회, 1961)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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