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방의 군현에서 호조를 비롯한 내의원, 의정부, 종친부, 중추부, 충훈부 등 중앙기관에 상납하던 인삼을 ‘공삼(貢蔘)’이라 하고, 그 제도를 ‘공삼제(貢蔘制)’라고 한다. 호조는 각 군현의 채삼량(採蔘量)을 고려하여 공안(貢案)에 일정한 수량을 기록하고, 매년 봄[春等], 가을[秋等], 겨울[臘等] 등 절기에 현물로 인삼을 수취하였다.
조선 인삼은 동아시아 다른 지역에 비하여 약효가 월등하다고 평가되어 일찍부터 공납제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공삼은 대내적으로는 국왕과 왕실 일원을 위한 내국어공삼(內局御貢蔘)을 비롯하여 여러 중앙 각사에 대한 약재 지급용으로 사용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조공품(朝貢品), 북경에 가는 사절단의 경비, 일본에 대한 회사품(回賜品)과 무역 물품으로 이용되었다. 조선 전기 공안에 기록된 평안·함경·황해·강원도 등 4도의 공삼 수량만 무려 1,500근에 달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인삼 공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공삼제는 현물 공납(現物貢納)에서 수가무납(受價貿納, 값을 받고 사서 납품)의 형태로 운영 방식이 변화하였다.
조선시대의 부세제도 중 하나인 공납제의 수취 형태는 임토작공(任土作貢) 방식이었다. 즉, 공물로 분정된(分定)된 물품을 현물 그대로 중앙에 상납하게 하던 것이었다. 공삼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인삼의 무분별한 채취와 양란으로 인한 삼장(蔘場)의 파괴로 인삼 공급은 크게 줄어든 반면, 인삼의 수요는 민간의 인삼유통 확대, 삼상(參商)들의 활발한 상업 활동 등으로 증가하였다. 더구나 이 시기 공삼제도 공납제와 마찬가지로 방납(防納)과 대납(代納)이 성행하였다. 결국 조정은 기존의 방식으로는 인삼의 안정적인 조달이 어려워지자, 기존 공삼제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임토작공’의 명목 아래 현물로 납부되던 공삼은 17세기 대동법의 시행으로 인하여 미(米)·포(布)·전(錢)으로 납부되었다. 즉, 현물공납제로 운영되던 공삼제가 수가무납제로 변화하였던 것이다. 다만, 내의원에 상납할 내국어공삼에 한해서는 현물공납제를 고수하였다.
공삼이 수가무납의 형태로 바뀌면서 선혜청으로부터 미·포·전을 받고, 인삼을 조달하던 공인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관동삼계인(關東蔘契貢人), 세삼공인(稅蔘貢人), 인삼공물주인(人蔘貢物主人), 돈삼계공인(獤蔘契貢人)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 공인들은 공계(貢契)가 창설된 초기에는 비교적 후한 공가(貢價)를 지급하던 조정의 공삼정책에 따라 어느 정도 잉여를 남길 수 있었지만, 지속적인 채삼량의 감소에 따른 인삼 가격의 상승으로 인하여 대부분 파산하고 말았다.
수가무납 방식의 공삼제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자, 여러 정책을 추진하였다. 공안에 기록된 공삼의 수량을 줄여주는가 하면, 인삼 가격을 반영하여 공가를 올려주기도 하였다. 또한 인삼의 최대 생산지인 강계부에서 부족한 인삼을 확보하였고, 현물공납제로 운영되던 지역의 공삼을 경공화(京貢化)하여 지역민의 부담을 줄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정의 인삼 정책으로 공삼제는 수가무납의 형태로 19세기까지 계속 유지되다가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폐지되었다.
조선의 현물 재정체계의 근간을 이루던 공납제는 민에 대한 노동력과 생산물의 직접적인 지배를 전제로 한 제도였다. 특히 조선의 인삼은 약재로서 효능이 뛰어나 국내외적으로 많은 수요가 있었던 만큼 조정에서 특별 관리하던 공납품이었다. 그만큼 여타 공납제에 비하여 공삼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 공삼제를 ‘삼정(蔘政)’으로 부를 만큼 인삼은 중요한 물품이었다. 인삼은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전매국(專賣局)에서, 해방 이후에는 전매청(專賣廳), 한국담배인삼공사, 한국인삼공사에서 관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