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방 군현은 민으로부터 징수하던 세원을 통해 재정을 운영하였다. 민역(民役) 또는 잡역(雜役)으로 불리던 이 역은 토지인 결(結), 사람인 신(身), 가호인 호(戶)에 각각 부과되면서 결역(結役), 신역(身役), 호역(戶役)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17세기 전반 조선 왕조는 정규 부세인 공물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대동법은 공물의 부과 기준을 호(戶)에서 결(結)로 전환시킨 재정개혁이었다. 이와 함께 각 지방 군현이 자의적으로 수취하던 잡역도 대동법의 범주에 포함시키고자 했으나, 각 군현별로 상이하게 부과하여 운영하던 잡역을 통일된 기준으로 설정하기란 어려웠다.
대동법이 실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잡역 문제가 여전하자 지방 군현과 도(道) 차원에서 이를 해결할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군현 단위에서는 민고(民庫)를 설치하여 잡역에 대응해 갔다. 민고는 지방 관청에서 지방민과 상의하여 잡역 운영상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읍사례로 마련한 기구이다. 민고는 법제상 설치된 기구가 아니었으므로 군현마다 획일적이지 않고, 개별적으로 운영되었다. 보통 보민고(補民庫), 대동고(大同庫), 방역고(防役庫) 등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고마고, 군기고 등 특정 잡역에 대응하기 위하여 설립된 민고도 있었다.
조선 후기 국가 재정의 확보 및 감사와 수령에 의한 잡역 수취에 대응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으로, 성립 시기나 운영 방식이 일정하지 않다. 민고는 지방 감사·수령의 과다한 잡역 부과 때문에 생겼으며, 그것은 경제적으로 관과 민에게 편리한 점이 많았다. 종래 문제가 되고 있는 잡역을 면제하고 공용 재정을 충당하며, 기타 가징(加徵)을 금지시키려고 하였다. 또, 당시의 향촌 사회에서 향약이나 계를 조직하여 일시에 많은 세금을 낼 수 있는 방편으로 기금을 모아 세 부담을 해결해 가는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민고의 기능은 이른바 여러 가지 세를 부담하는 잡역으로 감사와 수령을 보내고 맞이하는 데 소요되는 쇄마가(刷馬價), 사신 접대를 위한 지칙(支勅) 비용 등 각 군현의 공적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또한 중앙의 각 기관들이 요청하는 물품, 추가되는 진상품, 칙사를 맞이하는 데 소요되는 접대 비용, 감사가 여러 고을에 물산을 책임 지워 납부하도록 하는 행위, 경주인(京主人)과 영주인(營主人)의 역가(役價) 등 공공 경비도 부담하였다.
결국, 민고는 백성으로부터 잡역세를 징수하여 이를 감영과 중앙의 각 사에 상납하거나 지방의 경비를 조달하는 재원으로 삼았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에 부과하는 결렴(結斂)과 호구에 부과하는 호렴(戶斂)이었는데, 남부 지방은 결렴을, 서북 지방은 호렴을 더 많이 실시하였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중심인 남부 지방은 토지 결수가 많았고, 평안도와 함경도는 상대적으로 토지보다 호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전결에 부과하는 방법은 정규의 전세 이외에 더 징수하는 것이지만, 전세 그 자체를 민고의 재정으로 돌리거나 진전(陳田)을 개간한 뒤 징수한 세액이나 무토궁방전(無土宮房田)의 면세결을 재원으로 삼았다.
한편, 호구에 부과하는 것은 대체로 양반을 제외한 민호(民戶)나 신분적 차등을 두어 특정 신분 계층인 군관(軍官)· 교생(校生)·보인(保人)을 정하여 그들에게서 세전(稅錢)을 징수하여 충당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확보된 재원은 민고절목(民庫節目)을 작성하여 운영하였다.
민고가 최대의 지방 재정 기구로 성장해 감에 따라 지방 재정 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민고가 지방 재정 활동에서 한 역할은 다음과 같다. 그 역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관청 내에 여러 기구와 직임에 자금을 지원하는 임무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각종 자금의 이식(利殖)을 대행하는 임무이다.
일례로 전자의 경우 경상도 합천의 민고에서 통인청(通引廳)에 조(租) 25석을 지원한 것과, 전라도 구례의 민고에서 공례사(公禮使)에 350냥, 승발(承發)에 300냥, 공방색(工房色)에 400냥을 지급한 사례가 그것이다. 후자는 확보된 전곡(錢穀)을 식리(殖利)하여 그 수입으로써 관용 경비에 보충하는 ‘존본취리(存本取利)’와, 민고전(民庫田)을 구입하여 그 지대(地代) 수입으로 충당했던 방법 이외에도 공금 또는 공곡(公穀) 등을 보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방 군현 단위에서 민고가 긍정적인 기능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고는 갑오·광무 개혁기에 지방 제도가 개혁되어 폐지될 때까지 존속하면서 여러 가지 폐단을 초래하였다. 그 폐단이란 부세(賦稅)의 수입과 지출을 중심으로 한 운영 방법상의 문제뿐 아니라 재원 관리의 부실이었다. 즉, 민고의 운영 규정이 처음부터 법제적으로 완벽한 것이 아니었고, 읍사례(邑事例)로서 점진적으로 설치되었기 때문에 그 운영 형태도 각양각색이었다. 민고의 폐단으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민고 재원의 세출이 팽창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시정책이 거론되자, 정부에서는 민고절목을 상세히 정하여 양입위출(量入爲出)에 의한 예산 제도의 실시를 강구하기도 했다. 한편,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에서 민고 폐단의 한 방책으로 공전(公田)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40∼50%대의 높은 이율 를 20%로 낮추자고 제안하였다.
이와 같이 다방면에 걸쳐 민고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19세기 중후반, 결국 민고는 초기의 의도와는 달리 지방 군현의 자금 조달을 합리화하는 기구로 전락하였다. 즉, 민고는 농민이 국가에 대한 부세 이외의 잡역 부담을 덜기 위하여 공동체적 납세 조직의 성격을 띤 농민 대응 기구의 하나였으나, 삼정(三政)의 문란과 함께 오히려 농민에 대한 수탈을 가중시키는 폐단이 되었으며, 후일 민란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