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의 부세 제도는 중국 당의 조용조(租庸調) 체제를 근간으로 운영되었다. 조용조는 토지세, 인두세, 공납세 등 3가지 형태의 부세를 의미한다. 그 중 토지세는 땅인 전결에, 인두세는 신체에, 공납세는 가호에 각각 부과되었다. 조선 왕조에서는 이를 통상 전세, 군역, 공물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부세 제도는 조선 전기까지 큰 변화없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17세기 이후부터 전세, 군역, 공물의 분정과 수취 방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공물은 대동법의 실시로 지세화되었고, 군역은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의 확대로 대부분 납포군(納布軍)으로 변질되었다. 군인으로부터 거두는 무명 즉, 포(布)의 수량이 병종에 따라 차이가 심화되자 영조 대에는 균역법을 실시하고, 군포를 1필로 통일하였다.
이와 달리 조선 후기 들어 새롭게 부세화된 명목이 있었다. 환곡(還穀)이 바로 그것이다. 환곡은 본래 흉년에 기민을 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본래의 목적 이외에 중앙 기관 및 지방 군현의 재정 수입을 목적으로 설치되기도 했다. 특히 19세기 이후 환곡은 사실상 국가 재정의 주수입원으로 기능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국가 재정은 전세와 대동세의 수취를 의미하는 전정(田政), 군사 징발과 군포 수납을 중심으로 하는 군정(軍政), 환곡의 분급과 모조(耗條)의 재정 활용을 의미하는 환정(還政) 등 삼정(三政)을 기반으로 운영되었다.
전정은 본래 1444년(세종 26)에 제정된 공법(貢法)에 따라 전품육등제(田品六等制)와 연분구등제(年分九等制)에 준거한 전세(田稅)의 부과 징수를 근간으로 이루어졌다. 그 성패는 정확하고도 공정한 토지 조사인 양전(量田)과 농사의 풍 · 흉의 정도를 조사하여 결정하는 연분(年分)의 시행 여부에 달려 있었다. 그래서 양전은 20년에 한 번씩 실시하고, 연분은 해마다 수령(守令) · 관찰사가 조사한 다음 경차관(敬差官)이 다시 확인하여 호조에서 심사, 결정하도록 『경국대전』에 명문화하였다. 그리고 이들 작업에 개재될 수도 있는 여러 가지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제도적 장치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전정에서 가장 중요한 양전이 규정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공법을 시행하던 15세기 중엽(세종∼성종 대)에 전국적인 양전이 실시된 이후, 1601∼1603년의 계묘양전, 1634∼1639년 갑술양전, 1718∼1720년의 경자양전 등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3차례 실시했을 뿐이었다. 국가 차원의 양전 사업이 시행되지 못하자, 군현별로 양전 사업을 추진하였다. 일명 '읍양전(邑量田)'이라 불리는 이 사업은 각 군현의 실제 경작지와 면세지를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령은 실제 경작하고 있는 토지임에도 불구하고 실결(實結)에 포함하지 않기도 했다. 이를 은여결(隱餘結)이라 하는데, 이는 대동법과 균역법의 실시로 줄어든 지방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군현 차원의 자구책이었다.
한편 연분은 16세기 이후 토호(土豪)와 수령 및 경차관들의 부정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물의를 빚었다. 따라서 전정에 따른 부정행위 역시 더욱 격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7세기 전반 조선 왕조는 전세를 4두(斗) 또는 6두(斗)로 고정시키는 영정법(永定法)을 단행하고, 18세기 전반에는 비총법(比摠法)으로 실시하여 예년의 풍흉을 고려하여 당해년의 풍흉을 예정하고, 급재(給災)를 내려 주었다. 따라서 18세기 중엽 이후 호조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정부는 각도의 감사가 보고하는 《재실분등장계》를 중심으로 전정을 운영하였다. 《재실분등장계》에는 도내 군현의 흉년 정도를 매우 심함[우심, 尤甚], 조금 심함[지차, 之次], 풍년[초실, 稍實] 등으로 구분하여 수록했는데, 이 구분이 기본적으로 재결 지급 기준의 근거였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토지에 새롭게 부과된 세목들이 있었다. 삼수미(三手米) · 대동미(大同米) · 결작(結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삼수미는 임진왜란 당시 창설된 훈련도감 군병의 급료를 지급하기 위해 신설한 것이고, 대동미는 종래 가호에서 거두던 공물을 토지에서 쌀로 거두던 것이다. 그리고 결작은 결전(結錢)이라고도 하는데, 균역법 실시로 인해 줄어든 중앙 군사 기관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토지에 부과한 세목이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 이와 같이 토지에 부과된 세목은 도결(都結)이라는 형태로 운영된다. 즉, 여러 세목으로 거둘 부세 총액을 토지 결수에 분배하여 산출하는 방식이다. 도결은 부세 수취의 편의성이 있기는 하지만 중간에 토호나 이서들의 농간이 개입될 여지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도결은 1862년 임술민란 당시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군정(軍政)은 원래 6년에 한 차례씩 작성되는 군적(軍籍)에 의거해 번상병(番上兵)을 차출하고 그에게 보(保)를 정급(定給)해 주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병무 행정의 하나였다. 그러나 15세기 말엽부터 번상병에 대한 방군수포(放軍收布 : 현역복무를 면제하고 그 대신 보인(保人)에게서 받는 군포를 해당 군영에서 수취하는 것)의 관례가 생겨났고,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군사 재원을 군포(軍布)에 의존하는 군영(軍營)들이 오위(五衛) 대신 설립되자, 군정은 사실상 군포의 부과 · 징수를 행하는 하나의 수취 행정으로 변하였다.
임진왜란 이후는 군영이 아닌 행정 관서에서도 경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이의 보충을 위해 보인을 정급해 수포하였다. 그런데 이들 보인은 각 아문(衙門)의 보인 확보 경쟁으로 인해 군영 소속의 보인보다 수포량이 적었다. 군영의 군포가 대체로 1년에 2필(匹)인데 대해 아문의 수포는 1필 정도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보인들이 다투어 부담이 가벼운 아문으로 투탁해 갔고, 또 그것은 거의 제한 없이 받아들여져서 군영의 군보는 날로 줄어들었다. 거기에다가 당시 양인들에게는 군포 자체가 무거운 부담일 뿐 아니라, 양반에 대한 면역에서 조성된 군역의 천시 경향 때문에 완전한 면역의 길을 택하는 성향이 많았다. 그리고 그러한 길도 여러 가지로 열려 있었다.
우선 향교의 교생(校生)이 되는 것이 그 한 가지였다. 교생에는 액내(額內) · 액외(額外)의 구별이 있지만, 어느 경우에나 군역이 면제되었다. 수령이나 향교의 관리자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교생을 모집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강제로 교생이 되게도 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납물교생(納物校生)을 고강(考講)해 낙강자(落講者)를 군역에 환원시키도록 했지만, 납물교생은 날로 늘어 갔다. 다음으로 서원의 원생(院生)이 되거나 서원촌(書院村)으로 입촌하는 방법도 있었다. 원생은 교생과 마찬가지로 군역이 면제되었고, 서원촌은 서원의 경비를 구실로 그 촌민들의 군역을 사실상 면제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수령이 매향(賣鄕)하는 향직(鄕職)을 사서 면역하는 방법, 돈을 내고 향안(鄕案)에 올라 면역하는 방법, 아전들의 계방촌(契房村)에 등록해 신역을 면제받는 방법 등 여러 길이 있었다. 한편, 양반 세족(勢族)들은 자신의 이하거민(籬下居民)이나 묘직(墓直) · 묘호(墓戶) · 산직(山直) 등에게 면역을 주선해 주었고, 정부에서도 경제적 필요에 따라서는 공명첩(空名帖)을 발부해 면역의 길을 열었다. 따라서, 약간 부유한 농민이거나 권문(權門) 또는 아전(衙前)에 결부된 사람이면 군역을 벗을 수 있어서 군보의 수는 날로 줄어들었다.
그에 반해 면역 받지 못한 가난한 군인에 대한 징포(徵布)는 날로 가혹해졌다. 이른바 인징(隣徵) · 족징(族徵) · 동징(洞徵) 등의 징포 방법이 관행되고, 황구첨정(黃口簽丁)과 백골징포(白骨徵布)의 부정이 성행하였다. 여기에다가 후포(後布) 또는 후전(後錢)이라는 정채(情債)까지 부가되었다. 게다가 더욱 문제인 것은 병종별로 납부해야 할 군포가 상이했다는 것이다. 일반 보병은 1인당 2필의 군포를 부과했지만, 수군의 경우 3필이었고, 4필이 넘는 병종도 존재하였다. 따라서 군포를 납부하는 군인들 속에서도 병종을 옮기고자 하는 움직임이 많아졌다. 이는 군대 편제 및 지휘 체계를 흔드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이와 같은 군정의 문란은 양역(良役)의 개혁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국왕 영조가 '조선은 장차 군역으로 인해 망하게 생겼다'라고 할 만큼 군포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다. 물론 17세기 말부터 신분에 관계없이 집집마다 일정한 수량의 포를 징수하자는 호포론(戶布論), 모든 남정(男丁)으로부터 일정한 수량의 포를 징수하자는 구포론(口布論), 전결을 기준으로 포를 징수하자는 결포론(結布論), 양반이 아닌 면역자에게서도 포를 징수하자는 유포론(遊布論) 등이 개선책으로 논의되었으나 사족들의 반발로 모두 무산되었다. 그러다 1750년(영조 26)에 이르러서야 균역법(均役法)의 실시로 군포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균역법은 양역 균일화(良役均一化)와 감필(減匹)을 골자로 하고 있다. 즉, 전국의 모든 양역의 대가를 군포 2필로 균일화시킨 다음 실제 군인이 납부할 군포는 1필로 줄여 주는 것이 균역법의 핵심이다. 전국 양인의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감하면, 약 50만 필의 세입 감소가 발생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 왕조는 각 궁방 · 아문에 절수(折受)된 어전(漁箭) · 염분(鹽盆) · 선척(船隻)에서의 세수와 낙강(落講)한 면역자에 대한 징포[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그리고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6도 전결에서의 1결당 쌀 2두씩을 징수하는 결작(結作) 등으로 충당하였다. 그리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재정 기구로 균역청을 출범시켰다. 그 결과 양인의 군포 부담이 반감되었다.
그러나 양인들이 군인으로 징발되어 군포를 납부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군정 정책은 크게 변화가 없었다. 따라서 균역법 실시 이후에도 양인의 도망과 피역은 여전했고, 그에 따른 첩역(疊役)과 백징(白徵)의 사례도 늘어나 가난한 농민을 괴롭혔다. 19세기 군포 문제가 여전하자, 지방 군현에서는 동포제(洞布制)를 실시하여 대응하기도 했다. 동포제는 개개인에게 부과된 군포를 마을 차원에서 공동 부담하는 형태이이다. 이 제도는 18세기 초부터 일부 지방에서 시행되던 군포의 이정법(里定法), 즉 실제의 군정 수(軍丁數)에 관계없이 매년 일정한 수량의 군포를 각 동리별로 주민이 공동 부담해 납부하는 방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게 함으로써, 양반 면역자들도 군포의 일부를 부담하는 조처였다. 그러나 동포제는 양반들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 시행 여부를 각 지방에 맡기게 되었다. 따라서 양반 세력이 강한 마을에서는 종전의 군포제가, 양반 세력이 약한 마을에서는 새로운 동포제가 시행되는 각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군포의 수취는 고종 때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권하면서 제정, 시행한 호포법(戶布法)에 의해 완전히 폐지되었다. 신분에 관계없이 집집마다 호포(戶布) 또는 호전(戶錢)을 내게 해 신역의 하나인 군포를 호세(戶稅)로 바꾼 것이었다. 하지만 군역 자원의 부족과 그에 따른 군포 부담의 불균형이라는 문제는 계속되었고, 이 또한 1862년(철종 13) 임술민란 발생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환곡은 춘궁기에 빈민에게 곡식을 대여하고, 추수기에 환수하는 일종의 농민 안정책이다. 환곡은 대여와 환수 과정에서 줄어든 원곡 손실분을 보충하기 위하여 1/10을 추가로 징수하였다. 이를 모곡(耗穀)이라고 한다. 그런데 명종 연간 모곡 중 1/10을 덜어내어 호조의 회계 장부인 회안(會案)에 기록하는 ‘일분모회록(一分耗會錄)’을 실시하면서 환곡은 국가 재정을 보용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7세기를 전후하여 발생한 두 차례의 전란으로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인조 연간 정부는 김응조(金應祖)의 건의를 수렴하여 일분모회록(一分耗會錄)을 삼분모회록(三分耗會錄)으로 확대하였다. 즉, 1석의 모곡 1두 5승의 30%인 4승 5홉이 호조의 장부에 기록됨으로써 공식적인 재원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확보한 3분모는 중앙과 지방의 각종 경비에 지출되었고, 일부는 원곡에 합산되어 백성에게 다시 분급되었다.
원곡 수량의 증가로 민의 부담이 증가하자 1650년(효종 1) 정부는 삼분모회록을 폐기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상평청이 칙사 접대 비용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삼분모를 요청하였고, 효종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3분모는 호조에서 상평청으로 이관되었다. 여기에 3분모를 상실했던 호조도 얼마 지나지 않아 1분모를 다시 회록하면서 환곡의 모조를 재정 수입원으로 삼는 ‘취모보용(取耗補用)’이 본격화되었다. 초기에는 호조와 상평청을 중심으로 취모보용이 이루어졌지만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중앙의 여러 아문에서도 환모를 재정 수입원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중앙 아문이 환곡을 재정 보용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이 지방 아문도 이를 주요한 재정 수입원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8세기 전국의 환총은 약 1,000만 석에 육박하였다.
환총의 증가에 따라 분급될 환곡량은 늘어났고, 그에 따라 환호의 대상도 확대되는 등 백성의 환곡 부담은 점차 심해졌다. 그리고 군현별로 수십 종에 달하는 환곡의 회록과 분급 방식이 제각각이라는 점도 문제였다. 각 아문과 군영마다 회록의 비율이 달라서, 어떤 관청에서는 전모(全耗)를, 어떤 관청에서는 절반을 회록하기도 하였다. 어떤 환상(還上)에서는 원곡을 모두 대여해 취모하는 진분(盡分)을 행하고, 어떤 환자에서는 절반을 대출하고 절반은 남겨 두는 반분반류(半分半留)를 행하였다. 환자하는 양곡도 벼 · 백미 · 보리 · 밀 · 콩 등으로 다양하였다. 또한, 환자의 모곡을 돈으로 바꾸어 내게 하는 작전(作錢)이 성행하여 환곡 운영을 더욱 복잡하게 하였다. 지방에 따라 매년 농사의 풍흉이 달랐기 때문에, 흉년이 든 지방, 즉 쌀값이 비싼 지방에서는 모곡을 시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작전하게 하고, 그 돈으로 쌀값이 싼 지방에서 곡식을 사서 원곡과 수익을 증대시켰다. 여기에 이서들의 부정행위가 더해지면서 환정 운영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중, 환정 운영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포흠(逋欠)이었다. 포흠이란 장부에 기록된 곡물에 비해 실제 보유한 곡물이 부족한 경우를 말한다. 이는 백성에게 나눠 준 곡물이 회수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포흠은 평소 지방 군현의 수령과 이서들이 묵인하는 것이었으나, 감사나 어사들의 조사로 인해 드러날 경우 일시에 많은 양의 곡물을 상환해야 했다. 이때 환호가 부담해야 할 환곡량이 대폭 늘어나게 되는데, 임술민란 직전 진주의 한 가호에 적으면 8∼9석, 많으면 50∼60석이라는 점은 이를 잘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결국 임술민란 당시 전국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핵심적인 요구 사안은 포흠곡에 대한 처리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조선 왕조는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고, 바로 환곡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실제 보유곡을 모두 돈으로 바꾸어 150만 섬의 항류곡(恒留穀)을 만들어 흉년에 대비하게 하되, 2년마다 개색하고 모곡의 부가도 없게 하였다. 그리고 1868년(고종 5)부터는 각 면별로 사창(社倉)을 설치하고 자치적으로 운영하게 해 환정의 폐해를 줄여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