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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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락
개념
조선시대 서원의 재정적 · 인적 기반이 되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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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서원의 재정적 · 인적 기반이 되던 마을.
내용

서원촌의 주민은 서원에서 청소와 심부름, 수직(守直), 제수(祭需) 마련, 유생공궤(儒生供饋) 등 원노(院奴)가 하는 잡역을 담당하였다.

법전상으로는 사액서원을 제외하면 서원촌 주민의 면역규정은 없지만, 서원은 향교의 예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고, 사액서원의 면역 예도 있었으므로 서원이 예조(禮曹)·성균관·수령에게 요청하여 완문(完文)이나 관문(關文)을 받아 주민의 연호잡역(煙戶雜役)을 면제해 주었다. 이런 경우 서원촌은 제역촌(除役村)이 되는 것이다.

면역의 범위는 조선 후기에 커다란 민폐였던 환자[還上]·고마출역(雇馬出役)·세미부석군(稅米負石軍) 등을 비롯하여 한정(閑丁)의 용인과 같은 군역(軍役)에까지 이르렀다.

서원은 원칙적으로 제향되는 인물과 관계가 깊은 양반이나 수령이 토지·노비·금전을 기증하거나, 사원의 재산을 흡수함으로써 설립되었다. 이러한 경우 토지경작 농민이나 승려가 거주하는 사원촌이 서원촌으로 되었다.

서원은 이와 같이 사유적 성격의 토지에 세워졌으므로 결국 서원촌도 서원 주변에 있게 마련이었다. 특히 서원이 많이 생겨나면서 한 가문의 세력기반이 되었다. 그러므로 서원촌도 서원에 관계하는 양반지주의 소작인이 모여 사는 마을이 많았다.

서원은 향촌지배기구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서로 경쟁적으로 세력을 확대하였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서원촌을 두려고 힘썼다.

반면에 주민들 중에서도 부민(富民)들이 거주하는 마을은 일종의 투탁으로 서원의 계방촌(契枋村)이 되어 각종 연호잡역을 면제받으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계방촌은 서원의 속촌(屬村)으로 일정한 부담을 지는 대가로 제역촌이 되었다. 유력한 서원일수록 많은 수의 서원촌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국가에서는 서원촌의 증가가 결국 지방재정의 궁핍과 역의 편중을 의미했으므로 그것을 억제하려고 하였지만, 결코 쉽지 않았으며 특히 경상도지역에 그 폐해가 컸다.

참고문헌

『목민심서(牧民心書)』
「조선서원의 경제구조」(민병하, 『대동문화연구』 5, 1968)
「조선후기 서원의 경제기반」(윤희면, 『동아연구』 2, 서강대학교, 1983)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Ⅱ」(이수환, 『대구사학』 26, 1984)
집필자
장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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