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재(給災)는 토지를 대상으로 재해의 정도에 따라 감면 혜택을 주는 제도였다. 그러나 각종 부세가 전결(田結)로 집중됨에 따라 급재는 전세뿐만 아니라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 등 부세 수취 전반과 관련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급재 원칙은 모든 토지를 대상으로 재해[災實]의 비율에 따라 면세하는 방식, 즉 비율급재방식(比率給災方式)을 적용하였다. 전체적으로 재해를 입은 토지와 농사를 짓지 않고 전부 묵힌 토지는 조세를 면제하고, 절반 이상 재해를 입은 토지는 그 재해 정도가 60%이면 60%를 면제해 주고 40%만 받아들이는데 90%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규례대로 조세를 받는다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속대전(續大典)』에서는 그 방식이 바뀌었다. 그 해의 풍흉의 내용에 따라 작성된 연분사목(年分事目) 내에 재해의 명목[災名]을 지정하여 각 도에 나누어주는 재명급재방식(災名給災方式)이 시행된 것이다. 이때 연분사목에 따라 반포되는 재명은 영재(永災)와 당년재(當年災)로 구별하였다. 영재(永災)에는 냇물이 다른 쪽으로 흐르는 바람에 논밭이 떨어져 나가 버린 곳[川反浦落]이 해당되었고, 당년재(當年災)에는 처음부터 씨를 뿌리지 못한 곳[初不付種], 이앙하지 못한 곳[未移秧], 늦게 이앙을 마친 곳[晩移秧], 이삭이 패지 않은 곳[未發穗], 수해를 만난 곳[水沈] 등이 있었다.『속대전』의 재명급재방식은 경차관이 농작 상황을 철저히 검사해야 실현될 수 있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해 많은 폐단을 낳고 있었다.
이에 18세기에는 정한급재방식(定限給災方式)과 비년급재방식(比年給災方式)이 채택 적용되었다. 정한급재방식은 토지 원장부에서 급재결수를 재상의 정도에 따라 미리 책정하여 나누어주는 방식이었다. 비년급재방식은 각 도의 전결총수와 각 년의 급재등록(給災謄錄)을 고찰하고 그 해의 풍흉을 아울러 참작한 뒤, 각 도의 급재결수를 분등비년(分等比年)하여 반급하는 방식이었다. 정한급재와 비년급재는 전정 운영에 절제가 없고 공평하지 못하여 부득이 시작된 것이었으나, 조선 정부로서는 일정 액수의 결총을 확보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1730년대 무렵부터는 거의 매년 특정 해의 연분총수를 고려하여 수세하는 비총(比摠)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비총제(比摠制)는 호조가 유래공탈전(流來公頉田)을 일일이 제외한 원총(元摠)과 그 해의 풍흉에 상당하는 연도의 수세실결인 실총을 비교하여, 당해 연도의 수세실결인 실총(實摠)과 면세결수인 재총(災摠)을 각 도에 반급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각 도의 감사는 당해 연도의 사목재결의 수량과 각 도 실총 이외의 결수를 상호 비교하여 각 읍에 급재결수를 삭감·분배하고 실총에 입각한 수세를 시행하는 것이었다. 비총제는 1760년(영조 36)에 법제화되고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 명문화되었다.
전세 수취는 국가 재정의 근간이었다. 이의 운영을 위해서는 농경지와 소유자, 토지의 비옥도 등을 파악하는 양전 제도와 그 해의 풍흉을 조사하는 답험과 급제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 중 급재는 양전이 규정대로 실시되지 못한 상황에서 균부 균세(均賦均稅)를 이루는 것이 관건이었다.
전세 비총제는 도별, 군현별로 전체 급재의 수량을 비슷한 작황을 보인 해와 비교하여 미리 결정하고 나머지를 실결로 하여 전세 및 전결세를 상납케 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면리가 하나의 수세 단위가 되었고, 초실(稍實), 지차(之次), 우심(尤甚)으로 분등(分等)하였다. 중앙정부는 수세 과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면서 일정 총액을 확보하는 방안이었고 지방에서는 총액을 채우면 그 이외 운영에는 부담이 적었다. 이는 19세기 전결세 부분에서 도결화 현상으로 전개되었다.
급재제도는 농업 생산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농민의 재생산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였다. 이에 전세 비총제하의 급재 제도 운영은 19세기 전결세 일반, 군정, 환정의 총액제 운영에 영향을 미쳤으며, 어세·선세·노비신공 등 여타 부세의 수취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