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재는 재해 정도를 따져 부세를 경감하는 조세제도이다. 급재(給災)는 토지를 대상으로 재해의 정도에 따라 세금을 감면해 주는 제도였다. 각종 부세가 전결로 집중됨에 따라, 급재는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 등 세금 전반과 관련되었다. 급재제도는 농업 생산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농민의 재생산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였다. 급재 제도 운영은 19세기 전결세 일반, 군정, 환정의 총액제 운영에 영향을 미쳤으며, 어세·선세·노비신공 등 여타 부세의 수취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급재 원칙은 모든 토지를 대상으로 재해[災實]의 비율에 따라 면세하는 방식, 즉 비율급재방식(比率給災方式)을 적용하였다. 전체적으로 재해를 입은 토지와 농사를 짓지 않고 전부 묵힌 토지는 조세를 면제하고, 절반 이상 재해를 입은 토지는 그 재해 정도가 60%이면 60%를 면제해 주고 40%만 받아들이는데 90%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규례대로 조세를 받는다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속대전(續大典)』에서는 그 방식이 바뀌었다. 그 해의 풍흉의 내용에 따라 작성된 연분사목(年分事目) 내에 재해의 명목[災名]을 지정하여 각 도에 나누어주는 재명급재방식(災名給災方式)이 시행된 것이다. 이때 연분사목에 따라 반포되는 재명은 영재(永災)와 당년재(當年災)로 구별하였다. 영재(永災)에는 냇물이 다른 쪽으로 흐르는 바람에 논밭이 떨어져 나가 버린 곳[川反浦落]이 해당되었고, 당년재(當年災)에는 처음부터 씨를 뿌리지 못한 곳[初不付種], 이앙하지 못한 곳[未移秧], 늦게 이앙을 마친 곳[晩移秧], 이삭이 패지 않은 곳[未發穗], 수해를 만난 곳[水沈] 등이 있었다. 『속대전』의 재명급재방식은 경차관이 농작 상황을 철저히 검사해야 실현될 수 있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해 많은 폐단을 낳고 있었다.
이에 18세기에는 정한급재방식(定限給災方式)과 비년급재방식(比年給災方式)이 채택 적용되었다. 정한급재방식은 토지 원장부에서 급재결수를 재상의 정도에 따라 미리 책정하여 나누어주는 방식이었다. 비년급재방식은 각 도의 전결총수와 각 년의 급재등록(給災謄錄)을 고찰하고 그 해의 풍흉을 아울러 참작한 뒤, 각 도의 급재결수를 분등비년(分等比年)하여 반급하는 방식이었다. 정한급재와 비년급재는 전정 운영에 절제가 없고 공평하지 못하여 부득이 시작된 것이었으나, 조선 정부로서는 일정 액수의 결총을 확보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1730년대 무렵부터는 거의 매년 특정 해의 연분총수를 고려하여 수세하는 비총(比摠)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비총제(比摠制)는 호조가 유래공탈전(流來公頉田)을 일일이 제외한 원총(元摠)과 그 해의 풍흉에 상당하는 연도의 수세실결인 실총을 비교하여, 당해 연도의 수세실결인 실총(實摠)과 면세결수인 재총(災摠)을 각 도에 반급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각 도의 감사는 당해 연도의 사목재결의 수량과 각 도 실총 이외의 결수를 상호 비교하여 각 읍에 급재결수를 삭감 · 분배하고 실총에 입각한 수세를 시행하는 것이었다. 비총제는 1760년(영조 36)에 법제화되고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 명문화되었다.
전세 수취는 국가 재정의 근간이었다. 이의 운영을 위해서는 농경지와 소유자, 토지의 비옥도 등을 파악하는 양전 제도와 그 해의 풍흉을 조사하는 답험과 급제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 중 급재는 양전이 규정대로 실시되지 못한 상황에서 균부 균세(均賦均稅)를 이루는 것이 관건이었다.
전세 비총제는 도별, 군현별로 전체 급재의 수량을 비슷한 작황을 보인 해와 비교하여 미리 결정하고 나머지를 실결로 하여 전세 및 전결세를 상납케 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면리가 하나의 수세 단위가 되었고, 초실(稍實), 지차(之次), 우심(尤甚)으로 분등(分等)하였다. 중앙정부는 수세 과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면서 일정 총액을 확보하는 방안이었고 지방에서는 총액을 채우면 그 이외 운영에는 부담이 적었다. 이는 19세기 전결세 부분에서 도결화 현상으로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