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정부가 역관에게 무역자금으로 은화를 빌려주고 중국산 방한용 모자를 사오도록 한 제도.
개설
내용
그러나 17세기 말부터는 청나라와 일본 간에 직교역이 시작되었다. 왜관을 통한 중국 비단 및 물화의 수출로가 봉쇄됨으로써 조선으로 들어오던 은화는 현격하게 줄었고 무역은 침체되었다. 조선 중개무역의 주체였던 역관이 이 여파에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역관들은 국내의 판로도 대부분 사상에게 빼앗기는 난관에 봉착했다. 역관에게 보장된 팔포(八包)를 제대로 채워 갈 수 없었고, 관아로부터의 자금 대출도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역관은 사행 기간에 쓸 예물 값 외에 정보 수집비, 교제비, 뇌물 등 공용은(公用銀) 명목의 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역관의 어려운 처지를 돕고 무역의 이익을 보려는 목적으로 관모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역관이 수입한 모자는 중국 요동 중후소(中後所)의 모자창(帽子廠)에서 양털을 이용하여 만든 방한용품으로서, 주로 사대부나 부유층이 삼동(三冬)을 나는 데 사용하고, 다음 해에는 버리는 소비재성 사치품이었다. 수입된 모자는 서울의 모자전 상인[帽子廛民]·의주 상인·개성 상인에게 국내 판매를 위임시키고, 이들에게 모자 값과 이익의 일정량을 은화로 받아들임으로써 원금을 재 확보하고 이윤을 남겨 별사의 비용으로 비축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변천과 현황
그러나 공용은 마련과 외교경비 마련을 위한 방안은 있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1777년(정조 1)에 제정 시행된 세모법(稅帽法)이었다. 세모법은 정부가 은화를 마련해 주었던 관모제와는 달리 사상(私商)들이 직접 그들의 자본으로 모자의 수입과 국내 판매를 전담케 한 것이다. 그 대신 조선 정부는 수입 모자에 과세하여 공용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조선후기 대청무역사연구』(이철성, 국학자료원, 2000)
- Reevaluation of the Choson Dynasty´s Trade Relationship with Ch´ing Dynasty(Lee, Chulsung,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vo.l,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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