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포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중국 사행의 공식 인원에게 허가해 준 무역 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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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팔포는 조선시대 중국 사행의 공식 인원에게 허가해 준 무역 자금이다. 중국 사행에 필요한 여비를 자비로 부담한 것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사무역을 허용하였다. 조선 초기에 은화를 가지고 가는 것을 금지하고, 인삼 10근씩을 가지고 가도록 했다가 80근으로 늘렸는데, ‘10근씩 여덟 꾸러미’로 포장해서 팔포라고 했다. 은화로 환산할 수 있는 가치 칭량단위여서 인삼이 아니라 국내 생산물 가운데 가죽, 종이, 해삼 등 잡화로 대체할 수 있었다. 역관은 별포라고 하여 각 군문과 아문에서 빌려준 은화로 무역을 대행하거나 무역 권리를 빌려주는 공팔포(空八包)를 활용하였다.

정의
조선시대 중국 사행의 공식 인원에게 허가해 준 무역 자금.
개설

중국을 오가는 사행의 공식 인원은 그 기간에 필요한 각종 여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그 대신 조선 정부는 보상 차원에서 사무역을 허락하고 일정액의 은화를 가져갈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 세종은 사행 인원이 은화를 가지고 가는 것을 금지하고, 한 사람 당 인삼 10근씩을 가지고 가도록 했다. 1628년(인조 6)에서 1644년(인조 22) 즈음에는 명 · 청간 전쟁으로 사행길이 험해지자 한 사람 당 10근씩이었던 것을 인삼 80근으로 늘리고, ‘열 근씩 여덟 꾸러미’로 쌌는데 팔포(八包)라는 명칭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내용

팔포는 반드시 인삼 80근을 채워가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삼은 다만 당시 국내 생산물 중에 고가의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해외무역 물품이었을 뿐이었다. 1682년(숙종 8) 숙종은 당시 시가(時價)로 인삼 1근당 은화 25냥씩 환산하여, 사행 당상관에게는 은화 3천 냥, 당하관에게는 은화 2천 냥을 팔포 정액으로 결정했다. 이로써 팔포는 여덟 꾸러미의 인삼 80근이 아니라 은화로 환산할 수 있는 가치 칭량단위가 되었다. 따라서 국내의 은화 비축량이 급격히 떨어졌거나 인삼이 고갈되었을 때에는, 팔포에 은화와 인삼 대신 여러 가지 잡화(雜貨)를 정해진 가치만큼 채워갈 수 있었다.

변천과 현황

팔포는 사행의 공식 인원에게 주어진 무역특권이었다. 그 범주는 동지사의 경우 정사, 부사, 서장관, 역관, 만상군관, 군관, 화원, 사자관, 의원 등 대략 30~35명 수준이었다. 정사, 부사, 서장관 등의 팔포는 주로 보석 · 치장구 등의 사치품이나 서적 등에 쓰였고, 대외 무역이 목적은 아니었다. 반면 역관, 만상군관, 화원, 사자관, 의원 등의 팔포는 달랐다. 이들은 역관과 종적 횡적 유대관계를 가지고 연속적인 무역활동을 통해 이윤을 추구했다.

17세기 중반부터 약 1백 년 동안에는 조선이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을 통해 이익을 보던 시기였다. 이때에 무역은 역관이 중심이 되어 이끌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청과 일본의 직교역으로 왜관무역이 쇠퇴하고 국내 은광업도 위축되자, 1752년(영조 28)에는 팔포에 은화 대신 가죽, 종이, 해삼 등의 잡물을 채워가도록 되었다. 아울러 국내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상인, 개성상인, 의주상인들이 역관과 경쟁하며 서서히 대청무역의 주도권을 잡아갔다.

그동안 역관은 별포(別包)라고 하여 내의원이나 상의원은 물론 서울과 지방의 각 아문과 군문의 무역을 대행하기 위한 자금을 운영하고 있었다. 별포는 포외별송(包外別送)이라고도 했다. 별포는 원래 각 군문과 아문이 은화를 빌려 주는 무역 방식이었지만, 점차로 역관에게 무역 권리를 빌려주는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이를 공팔포(空八包)라고 했다.

역관은 이 별포무역을 통해 자금을 많이 가져갈 수 있었지만 자금력에서 사상에게 밀렸다. 이에 정조는 1797년(정조 21) 사행의 팔포에 홍삼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결정하고 「삼포절목(蔘包節目)」을 반포했다. 삼포는 사행원역이 채워갈 수 있는 홍삼을 의미했으며, 이처럼 공식화된 홍삼을 포삼이라고 구별했다. 포삼 1근에는 정해진 세액을 징수했는데 이것이 포삼제이다.

의의와 평가

팔포는 조선시대 대외무역의 추이와 성격 변화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역사 용어이다. 팔포가 단순히 ‘여덟 꾸러미의 인삼 80근’이 아니라 은화로 환산할 수 있는 ‘가치 칭량단위’가 되었다는 점, 동아시아의 무역 환경에 따라 팔포 권리를 행사하는 주체도 시기별로 달랐다는 점, 그 과정에서 조선 수출입 품목의 변화상을 파악할 수 있고, 조선의 경제적 발전과 한계를 전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동문관지(通文館志)』
『조선후기 중국과의 무역사』(유승주·이철성, 경인문화사, 2002)
『조선후기 대청무역사 연구』(이철성, 국학자료원, 2000)
「대원군 집권기 포삼무역정책과 해상 밀무역」(이철성, 『조선시대사학보』 35, 2005)
「조선후기 무역상인과 정부의 밀무역 대책」(이철성, 『사총』 5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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