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어지인(譯語之人) · 역어인(譯語人) · 역인(譯人) · 역학인(譯學人) · 역자(譯者) · 설인(舌人) · 설자(舌者) · 상서(象胥) 등으로도 불리었다.
역관은 중국과의 사대(事大), 왜 · 몽골 · 여진과의 교린(交隣) 등 외교에서 주로 통역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즉 사신과 함께 중국 등에 파견되어 통역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중국 등의 사신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왕 앞에서, 그리고 대신들 사이에서 통역을 맡았다.
그러므로 역관은 조선왕조의 사대교린, 즉 외교관계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다. 그래서 조정의 대신들은 역학 또는 역관을 천하게 여기면서도 역어의 임무가 국가의 중대사임을 자주 강조하였다.
조선의 역대 왕들도 건국 초부터 사역원과 승문원을 설치하고 인접 국가의 언어, 특히 중국어에 대한 학습을 장려하였다. 따라서 조선 초기부터 역관 양성을 목적으로 역과가 실시되었다.
역과는 기술관을 뽑기 위한 잡과(雜科) 중의 하나로 한학 · 몽학 · 왜학 · 여진학(뒤에 청학으로 바뀜.)의 네 종류가 있었다. 식년시와 증광시에 한학 13명, 몽학 · 왜학 · 여진학 각 2명씩을 뽑았으며(대증광시인 경우에는 각각 2명을 더 뽑았다.), 입격자에게는 종7품에서 종9품의 품계를 주어 각 사(司)의 권지(權知: 관직 임명 전의 관리후보자)로 분속시켰다가 자리가 나면 실직을 주었다.
이들은 정3품 당하관이 승진의 한계였다. 그러나 역관들은 사행을 따라 외국에 자주 드나들면서 밀무역을 부업으로 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밀무역은 중국을 내왕하는 역관들에 의해 많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무역 활동의 중심을 이루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역관들은 통역뿐만 아니라 무역에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편 역관들의 역학에 대한 정진은 간접적으로 국어학의 발전에도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위치하는 중인 신분으로서 행정 실무와 기술을 전담하고 이를 바탕으로 양반 못지않은 지식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사회적 차별 대우를 받아왔다.
양반 사회에 대한 불평은 조선 후기에 신분해방 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근대화의 과정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