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는 역어(譯語)라 하고, 역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역학인(譯學人) 또는 역학자(譯學者)라 하고, 통역에 종사하는 사람은 역어지인(譯語之人)·역어인(譯語人)·역인(譯人)·역자(譯者)·설인(舌人)·설자(舌者)·상서(象胥)·역관(譯官)·통사(通事) 등이라고 하였다.
역학부문을 관장하는 정부기관으로 고려시대에는 1276년(충렬왕 2)에 통문관(通文館)이 설치되었다가 고려 말기에 사역원(司譯院)으로 개칭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에 역과(譯科)가 정해지고 1393년 9월에 사역원이 설치되었다.
세종 때에 사역원에는 한학(漢學)·몽학(蒙學)·여진학(女眞學)·왜학(倭學) 등 4학이 갖추어졌으며, 특히 한어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조선시대의 역학자는 역과 출신 또는 취재(取才)와 같은 특별 등용으로 역학에 종사하게 된 부류와 한학강이관(漢學講肄官) 또는 습독관(習讀官)이나 승문원(承文院)의 한학질정관(漢學質正官) 출신이 있었는데, 역관들은 사역원의 관리, 지방 역학의 훈도 등으로 활약하였다.
중요한 임무는 통사(通事)였으며 실력에 따라 1등은 통사, 2등은 압물(押物)·압마(押馬), 3등은 타각부(打角夫)로 구분되었고, 통사에도 당상역관(堂上譯官)과 당하역관(堂下譯官)의 구별이 있었다.
이들 역관 가운데 조선초부터 세종 때까지 특출하였던 한어역관은 원민생(元閔生)·이자영(李子瑛)·김시우(金時遇)·선존의(宣存義)·김옥진(金玉振)·김청(金聽)·이흥덕(李興德)·윤인보(尹仁甫) 등이었다.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에는 김유례(金有禮)·장자효(張自孝)·장유화(張有華)·장유성(張有誠)·황중(黃中)·김저(金渚) 등이 활약하였는데, 황중은 원래 여진학통사였고, 왜학통사에는 서인달(徐仁達)이 있었다.
이 밖에 초기에는 설장수(偰長壽)·당성(唐誠)·조숭덕(曹崇德)·서사영(徐士英)·장현(張顯)과 같은 중국계 귀화인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들 이외에 문신 출신 역학자로서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활약한 이들은 이변(李邊)·김하(金河)·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김자정(金自貞)·이창신(李昌臣)·임사홍(任士洪) 등이었다.
이들이 남긴 업적은 대개 중국어 교과서로서 『직해소학(直解小學)』(태조 때, 설장수)·『직해동자습역훈평화(直解童子習譯訓評話)』(1449년, 성삼문 등)·『훈세평화(訓世評話)』(1473년, 이변)·『역어지남(譯語指南)』(1478년, 김자정 등)·『일용한어번역초(日用漢語飜譯草)』(1500년, 이창신) 등이 있다.
초기의 몽학자로는 주언(周彦)·송희명(宋希明)·조희고(趙希古)가 있었고, 1477년(성종 8)에는 윤자운이 몽고어·한어를 한글로 변역한 『몽한운요(蒙漢韻要)』 1권을 지었다.
연산군 이후 명종 때까지의 한어역관은 이화종(李和宗)·이응성(李應星)·안훈(安訓)·전명순(田命淳)·최세영(崔世瀛)·박정(朴菁)·홍겸(洪謙)·안자명(安自命)·최세협(崔世協)·김기(金驥)·곽지원(郭之元)·장세곤(張世琨) 등이었고, 왜학역관은 김석주(金石柱)·신자강(辛自强)·서수장(徐壽長) 등이었으며, 여진학통사로는 이효증(李孝曾)이 있었다.
이 시기의 문신 역학자로는 최해(崔瀣)·안팽수(安彭壽)·최세진(崔世珍)·주양우(朱良佑)·윤개(尹漑) 등이 있는데, 최세진만이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선조 때 활약한 한학역관은 홍순언(洪純彦)·정득(鄭得)·진효남(秦孝男)·진지남(秦智男)·임춘발(林春發)·한윤보(韓潤輔)·남호정(南好正)·표헌(表憲)·표정로(表廷老)·박의검(朴義儉)·박인검(朴仁儉)·이유(李愉)·이억례(李億禮)·이언화(李彦華) 등 다수에 달하며, 왜학통사는 경응순(景應舜)·김선경(金善慶)·박대근(朴大根)·김효순(金孝舜) 등이었다.
광해군 때의 한학역관은 송업남(宋業男)·신계도(申繼燾)·김득기(金得祺)·이응(李膺)·장예충(張禮忠)·장세굉(張世宏) 등이었고, 이 시기의 문신 역학자로는 김계(金啓)와 이준(李準)이 있었다.
인조 이후 1667년(현종 8)에는 여진학을 청학으로 바꾸었다. 역관들이 남긴 업적에는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 2권, 변섬(邊暹)·박세화(朴世華) 등 12명이 개수한 『박통사언해 朴通事諺解』 3권, 신이행(愼以行)·김경준(金敬俊)·김지남(金指南) 등이 지은 『역어유해(譯語類解)』 2권(1690), 『오륜전비주석언해(伍倫全備註釋諺解)』 등이 있다.
1761년(영조 37)에 변헌(邊憲) 등은 『노걸대신석(老乞大新釋)』 1권과 거의 같은 연대에 『노걸대신석언해』 3권을 지었고, 1765년에 김창조(金昌祚)가 『박통사신석(朴通事新釋)』 1권과 『박통사신석언해』 3권을 지었다. 1775년에는 김지남의 손자인 김홍철이 『역어유해보(譯語類解補)』 1권을 지었다.
1795년(정조 19)에는 이수(李洙, 초명 李湛)·장렴(張濂)·김윤서(金倫瑞) 등이 『중간노걸대』 1권을 엮었고, 『중간노걸대언해』 2권도 간행하였다.
1779년에는 이수가 중국어·만주어·한국어의 대역(對譯)사전인 『한청문감(漢淸文鑑)』 15권을 편찬, 간행하였고, 이응헌(李應憲)이 1883년에 중국어교과서인 『화음계몽(華音啓蒙)』 2권과 그 언해를 지었으며, 역시 고종 때에 『화어유초(華語類抄)』 1권이 간행되었다.
1639년에 신계암(申繼黯)은 종래 사용해오던 여진어교재 가운데 『구난(仇難)』·『거화(去化)』·『상서(尙書)』·『팔세아(八歲兒)』·『소아론(小兒論)』 등 5종의 책을 신제 만주글자로 개역(改譯)하였다.
그 뒤 1680년부터 1684년에 걸쳐 최후택(崔厚澤)·이집(李濈)·이의백(李宜白) 등 3명이 『팔세아』·『소아론』의 내용을 개정하고, 『구난』·『거화』·『상서』를 폐지하고, 대신에 『삼역총해(三譯總解)』 10권, 『청어노걸대(淸語老乞大)』 8권을 새로이 편찬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4종 20권으로 된 『청어총해(淸語總解)』로서 그 출판은 1703년부터 1704년에 걸쳐 청학관 박창유(朴昌裕) 등 6명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1691년에 청학관 이해(李海)·오상채(吳相菜)·정만제(鄭萬濟) 등이 만주어사전인 『동문유집(同文類集)』을 간행하였고, 1748년에 현문항(玄文恒)·김진하(金振夏) 등이 2권을 편찬, 간행하였다.
몽학교재로는 1741년에 몽학관 이최대(李最大) 등이 간행한 『몽어노걸대 蒙語老乞大』 8권이 있고, 1790년에 몽학훈장(蒙學訓長) 방효언(方孝彦)이 주장이 되어 간행한 『첩해몽어(捷解蒙語)』 4권이 있다.
몽학사전으로는 1768년에 몽학훈장 이억성(李億成)이 엮어서 간행한 『몽어유해(蒙語類解)』 2권이 있고, 1790년에 방효언이 간행한 『몽어유해보편(蒙語類解補篇)』 1권이 있다.
왜학관계 업적으로는 일본어교과서 『첩해신어(捷解新語)』 10권과 최학령(崔鶴齡)이 『첩해신어』의 내용만을 개수하여 1748년에 지은 『개수첩해신어』 10권 12책이 있다.
『첩해신어』는 1796년에 『첩해신어문석(捷解新語文釋)』 12권 4책으로 줄였는데, 편자는 왜역관 김건서(金健瑞)였다. 숙종 때 일본어 사서 『왜어유해(倭語類解)』 2권 2책이 엮어졌는데, 편자는 왜역관 홍순명(洪舜明)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