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교린은 조선시대에 우리나라가 주변 나라들에 취한 외교정책이다.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기본적 틀이었다. 힘이 약한 나라들은 중국에 조공을 보내고, 중국은 이들 나라의 통치자를 책봉해 줌으로써 우호적인 사대관계를 유지했고, 책봉을 받은 나라들은 주변 나라들과 교린관계를 유지하였다. 삼국시대부터 존재한 정책이지만 조선시대에 와서 정형화되었다. 명·청 교체기에 혼란이 있었고 소중화사상이 싹텄지만 병자호란으로 사대관계는 형식상 유지되었다. 일본과도 대립·갈등을 거듭했지만 대체로 교린관계가 유지됐다. 19세기말에 이 사대·교린관계는 붕괴되었다.
중국에는 사대정책으로, 일본 및 유구 · 여진 등의 나라에는 교린정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는 중국과 이웃한 나라들 간에 정치적 · 군사적인 긴장관계를 완화하고 상호 공존하기 위한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정책을 추구하였다.
중국보다 힘이 약한 나라들은 중국에 조공(朝貢)을 보내고, 중국은 이들 나라의 통치자를 책봉(冊封)해 줌으로써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이 관계를 사대관계라고 한다. 중국 주변의 나라들끼리는 이러한 사대 · 책봉 관계를 전제로 하여 책봉을 받은 나라들 간에 교린관계를 유지하였다.
‘사대(事大)’란 원래 중국의 상고 왕조인 은(殷)과 주(周)대에 약소한 제후국이 강대한 제후국에 정치 · 군사적인 복속의 표시로 공물(貢物)을 헌상한 것에서 유래한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영토의 크기나 인구 규모 · 경제력 등의 요인에 따라 국력의 차이가 생겨 서로 패권을 다투며 전쟁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들 국가 간에는 전쟁을 종식하는 방법으로 대소국 간에 예(禮)를 적용해, 회맹(會盟)과 조빙(朝聘)을 통해 상호 간의 우의 증진과 친선을 도모하였다. 대소국 간의 예란 나라 간의 우호 증진과 친선을 도모하는 ‘사대(事大) · 자소(字小)의 예’를 말한다.
이것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고[事大],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사랑해 주는 것이다[字小]. 그리하여 작은 나라는 믿음[信]으로 큰 나라를 섬기며, 큰 나라는 어짐[仁]으로 작은 나라를 보호한다는 원리이다. 따라서 이 사대 · 자소의 교린의 예에 의해 대소 열국 간에는 상호결속과 공존 · 공영이 이뤄졌다.
진 · 한대에 이르러 중국에 통일왕조가 성립하자, 왕조 내에서 군신관계의 표현형태인 봉건제가 성립되었다. 이 때 사대관계는 중국[大國]과 이웃나라[小國]사이에 그대로 적용되어 조공과 책봉의 외교행위가 이뤄지는 ‘책봉체제’가 확립되어 갔다.
책봉이란 본래 중국의 황제가 국내의 귀족이나 공신에게 왕(王) 또는 공(公) · 후(候) 등의 작위를 주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책봉을 진 · 한대 이후 주변국 군주들에게 적용해 왕의 작위를 주었던 것이다.
결국 책봉체제는 동아시아에서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사대 · 자소관계를 체계화한 상호 공존의 국제질서이다. 이 제도에 의해 동아시아 국제사회는 안정을 이뤄 갔다. 중국과 이웃나라 사이에 책봉관계가 설정되면, 책봉을 받은 나라의 통치자는 중국황제로부터 책봉을 알리는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받았다.
우리나라도 4세기 이후 고구려 · 신라 · 백제가 모두 중국의 여러 나라들에 사대를 하고 책봉을 받으면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후 모든 나라들이 한결같이 사대 · 책봉을 받은 것은 아니다. 이 관계가 정형화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1392년 7월 조선은 건국 직후에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태조 이성계의 즉위를 알리고 조공을 바치면서 사대의 예를 행했다. 명에서는 조선의 건국과 태조의 즉위를 승인했지만, 조선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곧바로 책봉을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명에서는 조선의 ‘여진인 유인사건 및 요동침범설’에 의혹을 품고, ‘생흔 3조’와 ‘모만 2조’를 들어 조선사신의 입국을 금지하였다.
이에 태자 방원이 해명사절로 명에 다녀오면서 양국관계가 호전되었다. 그러나 ‘표전문제’로 관계가 다시 악화되었다. 표전(表箋)이란 조선에서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로, 명에서는 조선을 의심하여 표전을 핑계로 여러 차례 분규를 일으켰다. 그러던 중 1398년 명태조가 죽고, 요동정벌계획의 주도자였던 정도전(鄭道傳)도 피살되자, 표전문제도 소멸되고 양국의 대립관계는 호전되어 갔다.
1401년 3월 명이 조선의 책봉을 알리는 고명과 인신을 보내 왔다. 그러나 곧이어 명나라에서는 황위쟁탈전이 일어났다. 이듬 해 9월 성조가 즉위하자, 종전의 고명과 인신을 취소하고, 1403년 4월 다시 새로운 것을 전달해 왔다.
이로써 명과 조선 사이에는 사대와 책봉관계가 맺어지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해마다 정기적인 조공사절[賀正使 · 聖節使 · 千秋使 · 冬至使]을 보냈다. 명에서는 조선에 새로운 국왕이 즉위할 때마다 책봉사절을 파견했다. 이후 두 나라는 명이 멸망할 때까지 큰 마찰 없이 상호 공존의 국제관계를 유지해, 임진왜란 때도 명나라는 이 명분으로 조선에 원병을 파견하였다.
그 뒤 중국에서 명 · 청이 교체되어 조선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했다. 인조의 친명정책은 청의 침략을 유발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결국 군사적인 열세를 면치 못한 조선은 청에 대한 사대와 책봉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조선은 19세기 후반 개항기까지 표면적으로는 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조선은 명의 멸망 후 중화문명의 계승자라는 소중화(小中華)사상으로 자존의식을 강화해 갔고, 그 구체적인 움직임이 한때 북벌론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중국에 대한 사대정책의 구체적인 외교행위로 전기에는 명에 조천사(朝天使)를 파견했고, 후기에는 청에 연행사(燕行使)를 파견했다.
한편 14세기 후반 일본에서도 아시카가(足利) 막부의 통일정권이 수립되었다. 일본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자국을 대표하는 정권으로 인정받고, 대내적으로는 정권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 명과의 사대관계를 성립시켜 갔다.
즉, 일본도 1403년 11월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음으로써, 조 · 일 양국이 모두 책봉체제 속에 편입되었다. 그러자 이듬해 7월 조선과 일본은 조선국왕과 일본국왕의 명의로 된 국서(國書)를 교환해 두 나라 관계를 ‘국가 대 국가’의 교린관계로 정형화했다.
그러나 조선은 고려 말 이래 왜구문제로 고심했고, 일본의 막부정권은 왜구를 통제할 힘이 약하여, 교린정책은 중앙의 막부정권과 왜구세력과의 관계로 이원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과 일본 간에는 조선국왕과 일본국왕(막부장군) 사이에 적례(敵禮)관계를 지향하는 ‘대등(對等)교린’과 대마도주(對馬島主)를 대리인으로 하는 지방세력과의 ‘기미(羈縻)교린’이라는 이중구조를 가진 독특한 교린체제가 성립했다.
그 결과 국왕과 장군의 관계는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해 통치권자 간의 국서 교환이라는 대등형식을 취했지만, 실제적인 통교관계는 행장 · 도서 · 문인 · 서계 · 포소의 제한 등 각종 규정으로 통제하는 기미정책으로 일본과의 교린관계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파괴하고, 교린관계를 붕괴시키게 된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일본의 강화 요청에 대해 ‘일본국왕’ 명의의 장군국서와 선정릉(宣靖陵)을 도굴한 범릉적(犯陵賊) 소환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즉, 명의 책봉체제를 전제로 교린관계를 회복하고, 조선침략의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측의 요구는 대마도가 일본국왕호를 사칭한 ‘국서개작(國書改作)’과 잡범을 도굴범으로 위장한 변칙적인 방법으로 이행되었다. 그리하여 1607년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와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에 의하여 조선 전기의 교린관계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곧이은 중국의 명 · 청 세력교체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커다란 변동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636년 병자호란을 겪고 조선은 어쩔 수 없이 청의 책봉을 받는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의 자존의식을 강화시켜 갔고, 일본에도 청의 책봉을 요구하지 않았다.
일본도 명 · 청과의 책봉체제 수립에 실패하자, ‘일본형 화이의식(華夷意識)’에 의거해 대외관계를 새로 편성하였다. 그 결과 조선과 일본 간에는 책봉체제를 배제한 ‘탈중화(脫中華)의 교린체제’를 재편성하여 중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연대감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두 나라의 대외인식은 모두 ‘자민족 중심주의’의 독선과 허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1636년 이후 양국 간에 ‘통신사’가 왕래하여 겉으로는 선린우호의 교린관계가 지속되는 것 같았지만, 내면적으로는 대립과 갈등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9세기에 들어 서구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교린관계는 동요했다.
결국은 1868년 교린체제의 형식을 무시한 메이지(明治) 정부의 서계사건과 1872년의 왜관 점령으로, 조 · 일 교린관계는 침략과 피침략의 관계로 변질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1876년 강화도조약에서 조선과 청의 사대관계를 부정함으로써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였던 사대교린체제를 붕괴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