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청 ()

조선시대사
제도
의주부(義州府)에서 포삼세를 비롯한 무역세를 거두고, 필요 재원을 분급(分給)하던 기관.
정의
의주부(義州府)에서 포삼세를 비롯한 무역세를 거두고, 필요 재원을 분급(分給)하던 기관.
개설

관세청(管稅廳)은 1814년(순조 14) 의주부윤 오한원(吳翰源)이 창설한 무역세 수납 담당 기관이었다. 관세청은 처음에는 의주상인[灣商]의 책임 하에 모세(帽稅)·포삼세(包蔘稅)·후시세(後市稅) 등의 무역품에 부과하는 상세(商稅)를 거두어 사행시 필요한 공용(公用)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홍삼 무역의 규모가 급격히 늘어나고 그에 따른 세입이 증가하자, 관세청의 비중도 커져서 ‘호조의 외고’라고 인식되었다.

내용

의주부 관세청은 19세기 중반 탈세 행위가 만연하면서 재정이 크게 악화되었다. 원인은 관세청을 담당하는 의주 상인의 힘으로는 각 아문·궁방·영읍(營邑)의 탈세와 탈법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1854년(철종 5) 「만부관세청구폐절목(灣府管稅廳捄弊節目)」을 반포하여 무역세를 철저히 거두려 하였다. 이에 따라 관세청에 중앙 정부에서 임명한 감세관(監稅官)이 파견되었다. 감세관은 사역원에서 파견하였지만, 비변사에서 발급한 관문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관세청 업무를 의주부를 거치지 않고 중앙에 바로 문서를 보낼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감세관 파견은 효과가 있었다. 1864년(고종 1)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은 “감세관을 설치한 뒤로부터 저절로 잉여분이 생겨서 경사(京司)에서 가져다 쓰는 것만도 벌써 수만 냥에 가깝습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감세관의 파견으로 관세청 수입이 증가했고, 그 잉여분을 자연스럽게 중앙 정부의 재정으로 활용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원군 집권기에도 이어져 중앙 정부의 경상비와 군비 증강 등 시급을 요하는 용도에 관세청의 수입이 사용되었다.

변천과 현황

의주부 관세청은 고종 연간에 ‘호조의 외고(外庫)’라고 인식되었다. ‘1866년(고종 3)에는 병인사옥(丙寅邪獄)과 병인양요(丙寅洋擾) 등 대내외적으로 불안한 정국이 지속되었다. 이에 더 많은 재원이 필요했다. 이해 10월 11일 의정부는 책문(柵門)에서 수입되는 물품뿐만 아니라 북경에서 수입되는 물품에도 동일하게 과세(課稅)하자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 감독 책임을 의주부 관세청에 맡겼다. 연이어 포삼 1만 5천근을 증액하고, 강화도 진무영에 1만근, 송영(松營)에 3천근, 옹진영(甕津營)에 2천근씩의 포삼세를 나누어 주었다. 1869년(고종 6) 6월에는 관세청에서 동래부와 충청수영에 각각 5천 냥씩 나누어 보내 왜인접대와 군수(軍需)에 쓰도록 했다. 9월에는 삼군부(三軍府)의 요청으로 황해도 초도진(椒島鎭) 이현포(泥峴浦)에 매년 2천 냥을 떼어 주어 해상 방어를 위한 군비로 사용하였다. 또한 12월에는 평안도 후창(厚昌)에 고을 설치를 위해 의주부 관세청에 있는 운현궁(雲峴宮) 별획전(別劃錢)을 사용한다고 결정하였다. 관세청에는 대원군이 사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재원도 있었던 것이다.

한편 1870년(고종 7) 1월에는 반민(泮民)의 급료 명목으로 매달 1천 냥씩, 삼군부(三軍府) 운영을 위해 매년 5천 냥씩을 관세청에서 끌어다 쓰게 했다. 1871년(고종 8) 1월에는 평안도 봉수를 지키는 군사의 의복 비용도 관세청에서 대도록 했다. 5월에는 신미양요(辛未洋擾)와 관련하여 별초군(別抄軍) 급료 명목으로 매년 8천 1백 60 냥씩 선혜청에 돈을 주도록 했다. 1872년(고종 9) 2월에는 호위청(扈衛廳)에 매년 1천 냥을 떼어 주도록 했다. 1873년(고종 10)에는 도성문세 혁파의 재원보충 방안으로 관세청의 포삼세가 쓰였다. 이에 1874년(고종 11)에는 관세청의 포삼세로 경상비를 보충하는 것이 거의 1백만 냥이라는 말도 나왔다.

의의와 평가

관세청은 무역세 수취를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여기서 거둔 무역세는 사역원 경비는 물론 정부의 경상비로부터 군비 증강 재원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활용되었다. 조선 후기의 대외 무역이 점차 국내 재정구조에 영향을 미칠 만큼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책 연구』(연갑수, 서울대출판부, 2001)
『조선후기 대청무역사연구』(이철성, 국학자료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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