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민중운동을 ‘민란(民亂)’과 ‘변란(變亂)’으로 구분한다. 변란과 비교할 때 민란은 대체로 향촌사회에 뿌리를 두고 그 속에서 생산 활동이나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해 나가던 사람들이 통문(通文)을 보내고 집회를 갖고 수령에게 민원을 호소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서 봉기하는데 일종의 ‘공동체적 강제’에 의해 주민들을 동원하지만 조직적인 무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투쟁 공간이나 지도부 및 참가층의 구성에서 고을 단위에 국한된 제한성을 보이고, 투쟁 구호도 대체로 특정 고을의 부세 수취와 관련된 부당함을 반대하는 고을 단위의 반부패 · 반불법 투쟁 차원에 머물렀다. 그러나 민중들이 근본적으로 근왕주의적(勤王主義的) 의식세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봉기 과정에서 파괴와 폭력이 수반되고 이서배(吏胥輩)들을 살해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국왕을 대신하여 목민(牧民)의 책임을 맞고 있던 수령에 대한 심한 공격은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투쟁 목표도 궁극적으로는 각종 정령과 부세 수취 등을 ‘국법’ 내지 ‘왕법’대로 실시하라는데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수령이나 이서배의 부정부패를 징치하고 고을의 폐단을 뜯어고치기 위해 일시적으로 읍권을 장악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민중운동을 민란과 변란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는 조선 후기 주로 19세기 사회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862년(철종 13)의 임술민란(壬戌民亂)과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으로 폭발하는 민중운동을 이해하기 위해 19세기에 나타난 각종 민중운동을 체계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초보적 저항인 ‘유망(流亡)’과 ‘항세 항조(抗稅抗租: 조세 및 지대 납부 거부)’로부터, 집단적 저항인 정소(呈訴) · 등소(等訴)와 명화적(明火賊), 민란 · 변란 등 다양한 민중운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민란과 변란을 대립적 전형으로 보는 시각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에 “난리에는 민란과 병란(兵亂)이 있다.”는 언급에서 비롯되었다.
민란과 변란은 19세기 사회사에 나타난 민중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지만, 19세기에만 유효한 개념이라고 볼 수 없다. 정권 획득을 위한 정치 투쟁으로서의 변란과 고을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경제 투쟁으로서의 민란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늘 있어왔던 통시대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민란과 변란은 명확하게 구분되는 개념이라고 보기 어렵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나, 1596년(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의 난과 같이 민란적 성격과 변란적 성격을 함께 지닌 사건들이 많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민란은 각각 발생한 시대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등장할 수 있다.
한국사에서 민란이 대규모로 발생한 시기는 크게 세 시기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9세기 신라 하대이고, 두 번째는 12세기 후반~13세기 후반의 고려 후기이며, 세 번째는 19세기 조선 후기이다. 각 시기별 민란의 배경과 전개 양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신라 하대 농민항쟁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지배구조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라 하대는 군현제를 통한 국가의 지배와 녹읍을 통한 귀족들의 사적인 지배가 촌락사회에 관철되었다. 그러나 하대 정치적 지배구조의 특성과 녹읍의 성격에서 기인하는 자체의 구조적 모순 때문에 후자의 지배만이 강화되는 추세였다. 이러한 지배 구조는 지방사회에서 국가권력의 견제를 받지 않고 언제든지 자의적인 수탈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도적으로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렇게 과중한 수취가 심화되어 농민층의 생존 기반까지 위협하는 형세에 이르자, 농민들은 귀족들의 수탈에 항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근대사회에서 유망(流亡)은 국가나 귀족들의 과중한 수취에 대한 농민층의 소극적 저항의 한 형태였다. 유망민을 포함하여 생계가 곤란한 농민들은 개별적으로 남의 재산이나 곡식을 약탈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는데, 그 사례가 혜공왕(惠恭王) 때의 도적 봉기였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농민들의 경제적 처지가 더욱 열악해지면서 도적들의 봉기도 더욱 빈번히 발생하였다. 819년(헌덕왕 11)에는 초적(草賊)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이들은 도적 행위뿐만 아니라 중앙귀족 권력투쟁의 무력 기반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9세기 후반에 이르러 신라의 사회경제적 모순은 극도로 첨예화되었으며, 농민들의 항쟁도 전국 규모로 확대, 발전하여 전면적인 농민항쟁 단계로 돌입하였다. 9세기 이전의 항쟁이 비교적 소규모 단위로서 산발적인 양상을 띠었음에 비해, 9세기 후반에는 대규모 조직화된 농민군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봉기하였다. 894년(진성여왕 8) 궁예(弓裔)가 그의 무리 3,500여 명을 14대(隊)로 편성하고 사상(舍上)으로 그 군대를 통솔하게 한 것은 농민군이 대규모로 조직화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이다. 견훤의 농민군도 5,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주목되는 것은 농민 항쟁이 목적의식성을 띠었다는 사실이다. 9세기 전반까지 농민들의 항쟁은 생활고에 견디지 못해 일어난 생존권적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나 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사회경제적 모순이 점차 첨예화되면서, 농민들 또한 국가나 귀족의 타도 없이는 그러한 모순이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점차 의식하였다. 이에 농민층의 의식은 반(反) 신라 항쟁으로 발전하였고, 궁예나 견훤 등은 이러한 의식을 고구려나 백제부흥의식과 결합시켜 농민층이나 지방세력들을 대대적으로 규합할 수 있었다.
889년(진성여왕 3) 부세 독촉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도적이 봉기했을 때 원종(元宗) · 애노(哀奴)가 사벌주(沙伐州: 지금의 상주)를 근거지로 반신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정부군이 무기력하게 대응하자 각지에서 농민이나 초적을 규합한 농민군이 활동하였고, 2년 뒤에는 죽주(竹州: 지금의 죽산)에서 기훤(箕萱)이 이끄는 농민군이 활동하였다. 기훤의 휘하에 있던 궁예는 대우에 불만을 품고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에서 활동하는 양길(梁吉)의 농민군에 의탁하였다. 양길의 농민군은 북원에서 봉기하여 강원도 동 · 북부지역과 패서(浿西) 지방으로 진격하였고, 국원(國原: 지금의 충주) 지역 등 충청북도 지방으로 그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강원도 동해안 지역의 농민군을 합세시키면서 세력을 키운 궁예는 예성강 이북 지역에서 활동하던 농민군이 자진 합세하면서 895년(진성여왕 9)에 양길로부터 독립하였다. 양길이 궁예에 패퇴하면서 농민항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른바 후삼국의 정립은 바로 9세기 후반 이래의 농민항쟁이 이들 삼국간의 치열한 국내전쟁으로 전환하였음을 의미한다.
옛 백제지역인 전라도 지역에서는 견훤(甄萱)이 이끈 농민군과 적고적(赤袴賊: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의 활동이 두드러졌고, 옛 고구려의 중심지인 평양지역 일대에서는 그 지역 농민군도 활동이 활발하였다. 이 밖에도 당시 신라 전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농민군이나 초적들이 활동하였다. 이처럼 농민군이나 초적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당시 피해를 입었던 부호 계층이나 사원 세력, 그리고 지방관리들이 자신의 재산이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을 모색하였다. 이렇게 각 지방을 할거하면서 신라 국가와 거의 독립적으로 자위력을 보유하고 그 지역의 통치자로서 등장한 사람들을 ‘성주(城主)’, ‘장군(將軍)’이라고 불렀다.
신라 말 농민들의 항쟁은 10세기에 새로운 양상으로 변화하였다. 경상도 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성주 · 장군을 자칭한 지방 세력이 등장하였고, 일부 농민군 가운데에서도 성주 · 장군과 같은 지방 세력으로 전환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들은 자신의 지배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서로 무력 대결을 벌였고, 그 와중에서 몰락하거나 아니면 강력한 지방 세력에 의탁하여 그 지위를 유지하는 자들도 있었다. 결국 크고 작은 세력들이 재편되면서 후백제(後百濟)와 태봉(泰封)의 성립을 가져왔다.
견훤은 892년(진성여왕 6)에 무진주(武珍州)를 치고 농민군을 규합하여 전라도 지역을 장악한 다음 900년에 ‘후백제왕’이라 칭하였다. 궁예는 894년(진성여왕 8)에 ‘장군’이라 칭하고 강원도와 패서 지역 등을 장악한 뒤,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을 차지하는 등 지배영역이 확대되고 통치력이 강화되자, 901년(효공왕 5)에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904년에는 마진(摩震)으로 국호를 바꾸고, 911년에는 다시 태봉으로 변경하였다. 후백제와 태봉이 성립된 뒤에는 농민군이나 초적들의 활동이 수그러들게 되었다.
<고려>
무신집권기에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현상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시기는 명종(明宗)과 신종(神宗) 때의 30여 년 간이었다. 그러나 민란의 선행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백성들의 유민화(流民化)는 이미 예종(睿宗) 때부터 나타났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민란은 농민들의 궁핍한 생활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민란이 집중된 명종 · 신종조에는 이의방(李義方) · 정중부(鄭仲夫)로부터 경대승(慶大升) · 이의민(李義旼)을 거쳐 최충헌(崔忠獻)이 차례로 집권하던 시기로서, 심한 정권 쟁탈전이 계속되어 정변이 끊이지 않던 혼란기였다. 이로 인해 정치 기강의 문란은 물론 중앙의 통제력도 약화되었다. 또한 무신집권기에 전통적인 신분질서가 문란해지면서 피지배 신분층의 사회의식이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무신정권 초기의 이러한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상황들이 고려시대 농민과 천민의 봉기를 가져온 주요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무신집권기 최초의 민란은 1172년(명종 2) 특수 군사지역인 서북면(西北面)에서 발생하였다. 서북인들의 항거는 1174년에 일어난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의 거병과 더불어 본격화되었다. 조위총은 이의방 · 정중부 등을 제거하고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거병하였으므로,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의 난과 일맥상통하였다. 그러나 김보당의 난이 중앙에서 파견된 병마사 기구가 거병의 중심이었던 데 비하여, 조위총의 난은 서북계 40여 성(城)의 도령(都領)에 이끌린 지역민이 중심이었으므로 민란의 성격이 더 강하였다. 이 난은 1176년(명종 6)에 가서야 겨우 진압되지만, 이후 잔여 세력들에 의한 봉기가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서북 지방에서 조위총 등이 항거하였을 때, 남부 지방에서는 ‘남적(南賊)’이라 불리는 도적이 민란을 일으켰다.
한편 1175년(명종 5) 석령사(石令史)의 봉기를 시작으로 1176년에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亡伊) · 망소이(亡所伊)의 무리가 봉기하였다. 그들은 공주(公州)를 함락시키고 진압군 3천을 패퇴시킬 정도로 기세를 떨치던 봉기군이었다. 이때 정부는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서 무력 토벌을 중지하고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투항과 재봉기를 거쳐 진압되었지만, 이 난은 특수 행정구역인 소민(所民)이 중심이 되었다는 점에서 신분해방운동의 성격이 있다.
그 외에도 남적의 봉기가 계속되었다. 1176년에 가야산(伽倻山)을 중심으로 일으킨 손청(孫淸)의 반란, 1177년에 익주(益州, 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에서 일으킨 미륵산적(彌勒山賊)과 이광(李光)의 반란 등이 있었으며, 1182년에 충청도의 관성(管城: 지금의 옥천)과 부성(富城: 지금의 서산), 전라남도의 전주(全州)에서 다시 반란이 발생하였다.
이의민 집권기인 명종조 후반에 소강상태를 보이던 민란은 말기에 이르러 다시 발생하였다. 1190년(명종 20) 동경(東京: 지금의 경주)의 남적을 시작으로, 1193년 7월에는 운문(雲門: 지금의 경북 청도)의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 지금의 울산)의 효심(孝心)이 중심이 된 대규모의 민란이 발생하였다. 반군들은 조정에서 파견한 관군을 번번이 패퇴시키며 기세를 떨쳤으나, 이듬해 2월에 김사미가 항복하면서 세력이 위축되었다. 효심 등의 세력은 계속 대항하였지만, 밀성(密城: 지금의 밀양)에서 토벌군에게 참패하고 효심이 체포되면서 항쟁을 마쳤다.
중앙에서는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국왕이 명종에서 신종으로 바뀌던 무렵에 남부지방에서 대대적인 민란이 다시 일어났다. 1199년(신종 2) 2월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에서 봉기한 무리는 삼척(三陟) · 울진(蔚珍)을 함락시키며 남하하였고, 동경에서 봉기하여 북진해온 무리들과 합세하였다. 그러나 이 봉기는 3월에 정부가 파견한 관인의 회유에 따라 우두머리가 투항하면서 진정되었다. 1200년에는 진주(晉州)에서 공사노예(公私奴隸)들이 봉기하여 인근 합주(陜州: 지금의 합천)의 농민들과 합세하기도 하였다.
1202년(신종 5) 11월에는 규모가 큰 경주의 모반이 다시 발생하는데, 이 모반에서는 신라(新羅)의 부흥을 표방한 점이 특징적이었다. 물론 신라의 부흥은 지역 백성을 결집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표방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경주 지역에서 민란이 빈발했던 점은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한 것이었다. 무신정권 등장 이후 신라계 세력이 가속화된 점이나 최충헌에 의해 제거된 이의민의 기반이라는 점 등이 그 배경으로 이해된다. 밀고로 좌절된 이 모반은 최충헌의 과민한 대응으로 인하여 지역민을 더욱 자극하였고, 이비(利備)를 우두머리로 한 반군은 한동안 세력을 떨치다가 1204년(희종 즉위)에 최종적으로 진압되었다. 이 밖에도 1217년(고종 4)에는 서경(西京)에서 고구려 부흥을, 1237년(고종 24)에는 전라도의 원율(原栗) · 담양(潭陽)에서 백제의 부흥을 표방한 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최충헌 집권 후의 민란은 수도 개경(開京)에서 먼저 발생하였다. 1198년(신종 1)에 발생한 최충헌의 사노(私奴) 만적(萬積)의 난이었다. 이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대규모로 진행되었고, 무신집권기에 노비 신분 해방을 목표로 일어난 천민반란이라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몽고의 침략 이후 농민들은 정부군과 나란히 항몽전에 참여하였다. 1차 침입 때 마산(馬山: 지금의 평안북도 귀주)의 초적(草賊)이 참전하였고, 광주(廣州)의 주민들은 관원과 협력하여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1232년(고종 19) 최씨 정권이 강화(江華)로 천도하자, 이러한 양상은 바뀌었다. 천도 직후 이통(李通)의 난을 시작으로 1236년(고종 23) 담양 이연년(李延年)의 난에 이르기까지 민란이 계속되었다. 이후 농민들은 민란의 형태로 저항하는 대신, 정부군 또는 관리를 살해하고 몽고에 투항하는 형태로 저항하였다. 이러한 저항은 동계(東界)와 북계(北界)의 변경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1258년(고종 45) 조휘(趙暉) · 탁청(卓靑)에 의한 화주(和州) 이북 지역의 투항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조선>
조선 후기의 민란은 18세기경부터 간간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19세기 중엽, 특히 1862년(철종 13)에 이르러 전국적인 봉기 양상을 보이기에 이른다. 민란은 고종 연간에도 계속되어 마침내는 1894년 전국적인 농민전쟁을 발전하여 중앙봉건권력의 타도를 외치기에 이르렀다.
임술민란(壬戌民亂) 즉 1862년 농민항쟁의 배경으로는 먼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토지에서의 극심한 농민층 분해와 그와 맞물린 국가의 지방 통치 체제에 의한 부세수탈로 인해 농민 경제가 피폐해진 점을 들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토지의 집중 현상은 더욱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소수 지주들에 의한 토지 집중은 상대적으로 많은 농민들이 아주 적은 토지를 소유하거나 아예 토지소유로부터 배제되었다. 전정(田政) · 군정(軍政) · 환정(還政) 등 삼정(三政) 수탈이 강화되면서 농민층이 최소한의 재생산 기반을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19세기는 정치적으로 세도정치기였다. 중앙 권력이 몇몇 벌열 가문에 집중되고 보수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지방에서는 재지 사족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수령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부세 운영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중앙정부에 의해 재정이 감액된 지방관청에서는 지방민에 대한 수취를 강화하여 재정을 보충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봉건 권력에 의한 농민 수탈은 강화되었고, 이는 19세기의 만성적인 삼정 수탈의 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농민들의 삼정 수탈에 대한 정소(呈訴) 운동 등 합법적인 반대 운동은 지방관의 적극적인 탄압에 의해 저지되었다. 농민들은 고을 단위로 자신들의 결집된 역량을 행사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자 하였다.
농민항쟁은 1862년(철종 13) 2월 4일 경상도 단성(丹城)에서 시작되어 3월에는 함양(咸陽) · 거창(居昌), 4월에는 밀양(密陽) · 선산(善山) 등지에서 일어났고 곧 경상도 일대로 확산되었다. 전라도에서는 3월 말 익산(益山)에서 처음 농민항쟁이 일어나서 4월 말과 5월 초에 집중되었고 충청도에서는 5월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9월에는 제주도에서, 10월에는 광주(廣州)와 함흥(咸興)에서 일어났다. 항쟁의 직접적 계기는 삼정(三政)으로 요약되는 부세문제였다. 특히 환곡의 운영과정에서 이서배(吏胥輩)들에 의해 발생한 포흠(逋欠)을 농민에게 부당하게 전가하는 문제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또 환곡이나 군포의 부족분을 토지세에 부당하게 부과하는 결가(結價)의 문제도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경제적 여건이나 계기는 비슷했지만 농민항쟁의 전개과정은 지역, 발생 시기, 조직 구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 대부분의 읍에서는 준비 단계로 통문 발송과 집회의 과정을 밟아 나갔다. 집회를 통해서 지방관이나 감사에게 호소하였지만, 이러한 방법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다수의 농민들이 집단의 힘으로 관청으로 몰려갈 것을 결의하였으며, 이것이 농민봉기로 나아갔다.
그 뒤 항쟁 과정은 일반적으로 여러 단계를 밟아 나갔는데, 첫째 단계가 항쟁을 결의하면서 농민들이 집결하는 과정이었다. 이를 위해서 농민 동원이 필요하였는데, 이렇게 농민을 모으고 항쟁에 참여시키기 위해서는 지도부의 역량이 중요했다. 둘째 단계는 읍을 공격하는 과정이다. 농민들은 읍내에 들어가서 가장 중심적인 문제들을 내세우면서 항쟁을 벌여나갔다. 그리고 읍내 지배층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수령은 동헌에서 끌어내려져 경계 밖으로 추방되었다. 이서배들은 집을 부수고 심지어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읍내 공격을 끝낸 뒤에는 한동안 읍내에 주둔하여 머무르면서 읍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읍내 공격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외촌(外村)으로 항쟁을 확대시켜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농민항쟁에 참가하는 계층은 소빈농의 처지에 있는 일반 농민이었다. 이들의 농민층 분해가 진전됨에 따라 경제적으로 열악한 빈농이 배출되었고, 때로 이들은 자소작으로, 소작을 붙여 가계를 끌어나가거나 소작지조차 없는 농민이기도 하였다. 신분적으로 평민이 주류였지만 노비계층도 함께 참여하였다.
한편 이 같은 농민들을 조직화하고 봉기를 주도한 자들은 일부 양반이나 농촌 지식인들이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중앙에서 중요한 관직을 지냈거나 지방관을 지낸 적이 있는 명망 있는 인물들이 적극 참여한 사례도 있지만, 몰락 양반 등 농촌 지식인과 농민층으로 구성된 지도부가 한층 강경한 대응을 하였다. 수리(首吏)와 향임(鄕任)들 가운데 일부도 항쟁에 가담하였다. 지도층들은 항쟁과정에서 향회(鄕會)를 열어 일반 농민들을 동원하였다. 또한 초군(樵軍)이 조직적으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봉기를 하면서 소지(所志)를 올렸는데, 이를 통해 요구사항을 알 수 있다. 농민들의 요구조건은 삼정(三政)과 결가(結價)에 대한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토지문제는 제기하지 못하였다. 농민들은 공적 권력과 사적 권력을 모두 공격하였다. 대체로 공적 권력에 대한 공격은 조세 체계를 이용하여 농민들을 수탈한 수령, 이서층을 대상으로 하였고, 사적 권력에 대한 공격은 읍내 사대부, 향원(鄕員), 지주가를 대상으로 하였다.
전국적인 농민항쟁은 봉건체제를 유지하는데 큰 타격을 주었다. 조정에서는 농민항쟁의 원인을 체제의 모순보다는 일부 수령의 실정(失政)에서 찾았다. 따라서 일부 수령을 제거하여 체제의 동요를 막으려 하였으며, 봉기 농민의 처벌도 비교적 소극적이었다. 조정에서는 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안핵사, 선무사, 암행어사 등 중앙관리를 파견하였다. 또 삼정에 대한 개혁 방안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을 설치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대책을 내놓았는데, 특히 파환귀결(罷還歸結)이 주목되었다. 환곡이 담당하던 재정을 토지에 부과하도록 한 것으로, 환곡을 폐지하고 8도의 전답에 결당 2냥씩 거두도록 하였다. 이 제도는 대신을 비롯하여 많은 반대에 직면하였고, 4도(都)를 중심으로 전국에 걸친 집단적인 저항이 벌어지고 농민항쟁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환곡을 옛날 법규로 되돌리고 결전 부과를 정지한다는 명령이 내려지기에 이르렀다.
환곡에 대한 실질적인 정책은 부분적인 탕감 조치만이 시행되었고, 환곡의 여러 가지 폐단을 시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지만, 곧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결국 농민항쟁에 대한 이 정책은 근본적인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끝맺고 말았다.
<신라>
신라 하대의 농민항쟁은 농민층의 유망→도적화→도적 봉기→농민항쟁→후삼국 간 국내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개별 혹은 소집단 규모로 고립 · 분산적으로 항쟁하다가 신라의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화되면서 점차 조직화된 대규모 농민군이나 초적을 구성하였고, 또 전국 곳곳에서 국가를 상대로 동시다발적으로 항쟁하는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900년 이후 후삼국 사이에 치열한 각축전이 전개되면서부터는 농민군의 활동은 일단 수그러드는 추세였으며, 사회변동의 주도권도 성주 · 장군을 비롯한 지방 세력에게 넘어갔다. 지방 세력들은 농민들의 항쟁을 자신들의 정치력을 강화하는데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마침내 그들이 주체가 되어 고려를 성립시켰다. 신라 하대 농민들의 항쟁은 신라를 멸망시키는데 결정적인 동력으로 작용했고, 고려의 성립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고려>
무신정권 초기의 민란은 일부 신분 해방운동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지방관 및 향리들의 수탈과 억압 등에 항거하여 봉기한 것으로 시간적 · 공간적으로 분산적이었다. 규모도 소규모였으며 다른 집단과의 연합이라는 측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명종조 말기 김사미와 효심의 봉기는 각기 다른 지역에서 일어났지만 뒤에는 합류하여 함께 싸웠고, 전투의 전사자가 7,000여 명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편 신라 · 고구려 · 백제의 부흥을 표방하고 나선 각 지역의 항거운동은 최씨 정권 혹은 고려 조정에 반기를 든 백성들의 항쟁으로 이전 시기의 민란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만적의 난은 그 규모나 계획의 치밀성뿐만 아니라 신분 해방과 정권 탈취를 함께 기도한 천인 신분의 봉기로서 매우 주목할 만한 운동이었다.
이후 최씨 무신정권이 확고히 자리를 잡으면서 희종대(熙宗代) 이후로는 민란이 가라앉게 되었다. 아직 농민과 천민들이 그들의 저항을 성공으로 이끌 만큼 성장하지 못한 탓이지만 그렇다고 그들 봉기의 의미가 낮게 평가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탐관오리의 제거와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노력은 물론, 이후 사회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한편 강화 천도 이후 농민들은 민란으로 저항하거나 몽고에 협조하는 형태로 저항하였는데, 이러한 농민저항은 대몽전 수행의 한계를 드러내게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정권 내부의 결속을 약화시킴으로써 몽고와의 화의론을 대두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조선>
1862년(철종 13) 농민항쟁은 봉건사회가 해체되는 시기의 여러 가지 사회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농민항쟁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을 보면 먼저 몇 개 지역을 제외하고는 군현 안의 저항에 한정되는 양상이 드러난다. 이렇게 농민봉기가 군현 단위에 머무른 것은, 행정이나 조세 수취 단위를 군현으로 파악했던 국가의 농민 지배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함양(咸陽)이나 진주(晉州)의 경우처럼, 이웃 군현까지 활동을 확대시킨 경우도 보인다. 농민들은 동한과 읍내 습격을 통해 조세 투쟁과 토호 · 사대부들의 불법적인 향촌 지배에 대한 응징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구체적으로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그 방법은 중앙에서 파견된 안핵사, 선무사, 암행어사에게 직접 호소하는 것이었다. 농민들은 농민항쟁 과정에서 조세제도의 철폐, 시정 요구를 통해 경제적 면에서의 반봉건을 주장하였고, 수령 · 관속과 읍권 담당자들에 대한 공격과 읍권 장악을 통해 현존하는 봉건적 통치체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 정치의식을 표출하였다. 반면 정부에서는 당시의 사회 모순을 균등한 조세 부과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즉, 농민항쟁으로 일어난 체제 붕괴의 상황을 삼정이정책의 시행을 통해 모면하려 하였던 것이다. 수탈의 잠정적인 후퇴를 가져올 수 있는 삼정이정책은 농민들의 봉기를 통해 얻어낸 구체적 성과물이기도 하였다. 농민항쟁이 일어난 뒤 성립된 대원군 정권은 대내적인 위기를 수습하기 위하여 호포법(戶布法), 사창제(社倉制)와 같은 일련의 조세개혁책을 실시했는데, 이는 삼정이정책의 일부를 계승한데 불과하였다. 결국 1862년 당시의 삼정이정책이야말로 당면한 사회 모순을 부분적이나마 해결하는데 있어서 정부가 제시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대응책임을 자인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