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6년 4월 3일, 고변인인 이석룡과 김충립을 포함하여, 체포된 관련자들에 대한 추국(推鞫)이 시작되었다. 안익신은 서울 출신의 면천(免賤)으로 일정한 주거가 없이 전국을 유랑하던 존재였다. 서울의 진사(進士)인 권대용, 이산의 유학(幼學)인 유탁, 연산(連山)의 교생(校生)인 이지혐, 이산의 교생인 홍영진 등이 유탁과 함께 변란을 주모하였다.
이 밖의 가담자들은 주모자들 및 다른 가담자들과 혈연 및 지연으로 연결된 사이였는데, 이산 · 연산 및 공주(公州) · 부여(扶餘) 등 충청도와 용담(龍潭) · 전주(全州) · 함열(咸悅) 등지의 출신이었다. 거병 과정에 속오군(束伍軍)이 조직적으로 동원되었다. 추국청에서 추국을 받고 안익신 등 46명은 처형되었고, 추국 과정에서 12명이 물고(物故) 되었다. 그밖에 공청도 · 전라도 감영에서 각각 22명, 11명이 처형되었다.
안익신의 모반은 인조대 내내 이어진 모반의 흐름을 계승하는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측면과 함께 민중의 저항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결합하여 발생하였다. 그 과정에서 민중들의 신망이 높은 임경업이 거명되었고, 최영(崔瑩)의 후예나 정씨(鄭氏) 진인(眞人)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이는 후에 『정감록(鄭鑑錄)』이 출현하는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