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천인이 본래의 신분을 벗어나 양인의 신분을 취득하는 신분제도. 속량·종량.
개설
연원 및 변천
조선 후기에 들어서도 면천은 꾸준히 시행되었다. 제도적으로 보면, 군공과 납속에 의한 면천이 주를 이루었다. 여기에 임진왜란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공사천무과(公私賤武科)와 참급무과(斬級武科)를 실시하여 병력을 확보하고, 적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과를 실시하여 천인에게 면천의 기회를 주었다. 면천의 대종을 이루는 것은 납속 종량이었다. 그 결과 조선 후기는 조선 전기와 달리 노비의 종량이 용이해졌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조응하여 1730년(영조 6)에는 노양처소생 종모법(奴良妻所生從母法)이 실시되었고, 1801년(순조 1)에는 내시노비(內寺奴婢)가 종량되었다. 그리고 1886년(고종 23) 노비가 세습되던 제도를 폐지하였고,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실시되면서 노비제도는 폐지되었다.
내용
사민 면천(徙民政策)은 북변 지역의 국방 내지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천인을 이주시키는 대신, 그 보상으로 면천해주는 방법이다. 사민은 세종 대에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세종 대 대여진(對女眞) 정책의 일환으로 북변 지역, 특히 함길도의 방어체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사민을 실시하면서 노비의 면천을 공인하여 주었다. 사민 면천은 성종 대까지 시행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거의 실시되지 못하였다.
한편 강도(强盜)를 잡은 것에 대한 포상으로 주어지는 포도 면천도 있었다. 포도 면천은 세종 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고, 『대전속록(大典續錄)』의 반포로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속대전(續大典)』이 반포되면서 강도를 잡은 천인은 면천되지 못하고, 면포를 시상으로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명화적(明火賊)을 5인 이상 잡은 천인에게는 면천의 특혜를 주었다.
납속 면책(納粟免策)은 국가에 곡식을 헌납하면, 그 반대 급부로 천인의 경우 면천을 허락해주는 정책이었다. 납속은 군수 납속과 진휼 납속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군수 납속은 전란이나 변란시에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하여, 진휼 납속은 기근시에 진휼곡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납속 면천은 조선 전기에는 널리 시행되지 못하다가 양란을 겪은 17세기부터 널리 시행되었다.
현황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속록(大典續錄)』
- 『속대전(續大典)』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조선후기노비제연구』(평목실, 지식산업사, 1982)
- 『조선후기노비신분연구』(전형택, 일조각, 1989)
- 「17~18세기 노비의 면천에 대하여」(장청욱, 『역사과학』, 1987)
- 「조선초기의 노비면천」(정재현, 『경북사학』5, 1982)
- 「17세기에 있어서의 노비종량」(평목실, 『한국사연구』3, 1960)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