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향리는 지방행정 사무를 관장하며 대를 이어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가리(假吏)는 향리 가계의 구성원이 아니면서 향역을 수행하고, 이를 자손들에게 계승하려고 한 자들을 지칭한다. 즉 가리는 향역자를 신분 계통에 따라 향리와 가리로 구분할 때 사용된 용어로, ‘가향리(假鄕吏)’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주로 공생(貢生)·율생(律生)·의생(醫生)·서원(書員) 등의 하층 향역을 담당했으며, 관아의 잡다한 공역(公役)을 수행하는 존재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가리들에게 육방(六房) 가운데 일부 직임을 할애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향리들이 수행하는 실무를 보조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가리는 1451년(문종 원년) 정월의 실록 기사에서 그 신분적 특징이 처음으로 확인된다. 기사의 내용은 향리의 수가 부족한 현실적 조건을 보안하고자 문자 해독 능력이 있는 관노들에게 향리의 업무를 수행케 한다는 것이다. 이때 이들을 가향리(假鄕吏) 즉 ‘임시직 향리’라 호칭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국가의 직역 운영에 있어 관노는 향역에 차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假)’를 덧붙여 ‘가향리’라는 명목으로 향역에 차정한 것이다. 이처럼 가리는 국가의 직역 운영의 원칙과 지방에서의 현실적인 조건 사이에서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양정(良丁)을 모집하여 자신들의 기관에 속하게 하는 사모속(私募屬)의 시행은 가리를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17세기의 백성들 역시 좀 더 편한 헐역(歇役)을 부담하기 위해 군현 내의 각 기관인 향교·서원 군관청·향청·작청 등에 속하고자 하였다. 이들 중 일부가 가리로 진출하였다. 공사천이 담당하던 가리의 직역에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지방 관아의 재정 확충 문제 및 군현 업무의 다양화에 기인한 것이다. 결국 가리는 향역을 임시로 대행하던 직역에서, 1677년(숙종 3)에 「호패사목」에서 국가로부터 하나의 직역층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향리들은 가리층의 유입 및 증가로 인한 향리 조직의 변화와 신분적 격하를 방지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고, 결국 조선 후기 가리층은 향리와 같은 계층적 위상을 확보하지는 못하였다.
조선 전기부터 향리를 단순히 행정사역인화하려는 정부의 시책과 재지사족들의 압박이 더해지면서 향리의 신분적 지위는 하락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상층 향리들은 스스로의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해 군공(軍功)이나 급제(及第) 등을 통해 신분상승을 꾀하였고, 하층 향리들은 역의 고역화에 따른 피역(避役)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향리의 수가 점차 축소되어 갔다. 가향리·가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정 수의 향리를 확보하기 위한 정부의 대책 중 하나였다.
그러나 가리는 ‘아전의 아전’이라고 일컬어지며 향리와 구분되는 신분 계층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는 『안동향손사적통록(安東鄕孫事蹟通錄)』에 실려 있는 「단안 완의(壇案完議)」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단안이란 향리들이 그들의 위계나 서열을 분명히 하고자 만든 것으로, 상층 향리에 임명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안에 이름이 올라있어야 한다. 그런데 가리와 혼인한 향리는 단안에서 제외한다는 규정을 통해 가리의 신분적 위상이 향리에 비해 낮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급증한 가리층의 유입은 향리 사회의 인적 구성을 바꾸어 놓았으며, 기존 향리층이 지배력을 유지하는 데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기존 향리들은 자신들의 우위를 보장받는 범위 안에서 새로 전입하여 온 부류들이 이서 조직(吏胥組織)에 편입되기를 원했다. 당시 향리들은 새로운 향리 자원, 즉 가리층의 유입에 대처하기 위해 기존 향리층 가계의 국가에 대한 공훈을 새롭게 정리하여 차별성을 두었다.
조선 후기 군현의 이서 집단은 흔히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동반은 향리 가문으로 서반은 가리 가문으로 구성하여 양자는 분립된 집단으로서 존속하였다. 요컨대, 가리는 조선 말기까지 향리와 뚜렷하게 구분, 차별받았을 뿐 아니라 양자 사이에는 확고한 위계질서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조선 후기 각 군현의 이안(吏案)에 향리와 가리를 뚜렷하게 구분하여 수록한 사실을 통하여도 입증된다.
임진왜란 이후 지방 군현에서는 향리를 비롯한 관속의 부족 현상을 메우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결과 새로운 인적자원을 다수 확보하였는데, 이는 17세기에 작성된 읍지류에서 확인된다. 17세기 경주의 향리층은 향리 16명, 가리 166명으로 구성되었고, 밀양은 향리 1명, 가리 60여 명, 아리(兒吏) 2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남원의 향리층은 향리 9명, 가리 30여 명이었다. 호적에서 ‘가리’직역으로 기재된 향리는 단성현의 경우, 1678년(숙종 4)~1732년(영조 8)의 5개 식년에 걸쳐 ‘본문’에는 30명, ‘도이상’조에는 26명이 등재되며, 이를 시기적으로 보면, 1678년에 가장 많은 수가 등재되어 있고, 시기가 지날수록 ‘가리’ 명목은 점차 사라진다.
가리층은 향역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향리층과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일반 양민에서 관노에 이르기까지 신분 구성이 다양하다는 점에서 기존의 향리와 차이가 있다. 특히 가리층의 유입은 상층 향리들이 혈연적인 요인만으로 향역을 유지하거나 계승할 수 없다는 자극을 주었다. 따라서 상층 향리들은 선조의 공훈을 기리거나 유력한 향리 가문과 혼인하는 등 내부 경쟁과 분화 과정을 겪으며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노력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