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조선 최초의 서예 이론서인 『필결』을 저술한 서예가, 유학자.
이칭
징지(澄之)
시호
홍도(弘道)
옥동(玉洞)
아호
서(瑞)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62(현종 3)
사망 연도
1723(경종 3)
본관
여주(驪州)
출생지
한양 소정동(小貞洞)
주요 저서
필결(筆訣)
내용 요약

이서는 조선 후기 조선 최초의 서예 이론서인 『필결』을 저술한 명망 있는 유학자이자 서예가이다. 가학을 토대로 평생 학문을 익히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수양과 실천을 중시하며 조선 최초의 서예 이론서인 『필결』을 저술하고,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만들었다. 거문고에도 능하였으며, 경서와 제자백가도 깊이 연구하였다. 성호 이익의 형으로서 훈도하고, 그의 문인들이 ‘홍도’라는 시호를 지어 학덕을 칭송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조선 최초의 서예 이론서인 『필결』을 저술한 서예가, 유학자.
가계 및 인적 사항

이서(李潊)의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징지(澄之), 아호는 서(瑞), 호는 옥동(玉洞)이다. 시호는 홍도(弘道)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소릉(少陵) 이상의(李尙毅)이며, 좌찬성을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호는 익헌(翼獻)이다. 할아버지는 이지안(李志安)으로 지평을 지내고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친아버지는 매산(梅山) 이하진(李夏鎭)으로 대사헌을 지냈으며, 친어머니 용인이씨(龍仁李氏)는 유수 이후산(李後山)의 딸이며, 계모 안동권씨(安東權氏)는 권대후(權大後)의 딸 이다. 이서는 다섯 형제 가운데 셋째이며,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그의 막내 동생이다.

이서는 10세에 숙부(叔父) 이주진(李周鎭)에게 입양되었다. 양어머니는 진사 윤증(尹增)의 딸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부인은 팔계군(八溪君) 정종영(鄭宗榮)의 현손인 참판 정약(鄭鑰)의 딸 초계정씨(草溪鄭氏)이다.

주요 활동

8세에 어머니 용인이씨를 여의고는 슬픔이 커서 눈병을 앓게 되었다. 입양된 후에는 양어머니와 생가의 의붓어머니에게 아들로서 효성을 다하였다. 양어머니 파평윤씨에게 책을 읽어드리거나 음식과 의복을 직접 살폈으며, 사망한 후에는 매일 성묘하였다.

21세인 1682년(숙종 8) 친아버지 이하진이 유배지인 평안도 운산(雲山)에서 사망하자 3년간 상을 치르고는 과거를 포기하고 학업에 전념하였다. 이때 사서삼경과 『의례(儀禮)』 · 『예기(禮記)』 · 『주례(周禮)』로부터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깊이 연구하였다.

20대 중반에 학문을 대성한 후 명리를 쫓는 한양을 떠나 포천 청량포(淸涼浦)의 선영 아래에 은거하였다. 당시 옥금산(玉琴山) 아래에서 머물며 문인을 양성하였는데, 사망하였을 당시 문인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이때 스스로 호를 ‘옥동(玉洞)’이라 하였다. 또한, 그의 소문을 들은 홍유거장(鴻儒巨匠)들이 멀리서도 방문하였는데, 모두 그의 학식과 예악(禮樂)에 감탄하여 당대의 진유(眞儒)로 칭송하였다.

30세를 지나면서 그의 학문과 덕망이 더욱 높아지자 재상 최석정(崔錫鼎)박세채(朴世采)가 천거하여 기린도 찰방(麒麟道察訪)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기에 벼슬을 하지는 않았다. 이런 가운데 44세가 되던 1706년(숙종 32) 중형인 섬계(剡溪) 이잠(李潛)이 장살(杖殺)되면서 더욱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다. 사후에 문인들이 의논하여 그가 학문과 도덕으로 유학을 크게 넓혔다는 의미로 ‘홍도(弘道)’라 사시(私諡)를 올렸다.

그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예로써 상대를 대우하였으며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거문고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사람들이 그의 덕망을 기려서 사용하던 거문고를 ‘군자금(君子琴)’[옥동금]이라 하였다. 이 외에도 아버지 이하진이 연행(燕行)시 구해온 왕희지(王羲之)의 수서(手書)를 보고 힘써 글씨를 익혔다. 그는 필법을 발전시켜 ‘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옥동필(玉洞筆)’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나아가 조선 최초의 서예 이론서인 『필결(筆訣)』을 저술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서는 아버지 이하진을 제외한 다른 스승을 찾아 학습한 경험이 없다. 그의 교육관과 교육 방법 및 교육 내용은 가문에서 전해오던 것을 계승하였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독서를 통한 박학(博學)의 추구와 사서(四書)를 중심으로 한 학습, 내면의 수양(修養)과 학문의 생활 속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학문의 최상위 목표를 ‘자득(自得)’의 경지로 설정하고 있었으며, 이 경지에 올라서기 위하여 절제되고 엄격한 교육 과정을 만들어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학습을 했다.

이러한 방법은 그의 문인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즉,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스스로 얻는 바가 있어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하며 태만해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학습 순서도 반드시 『 소학』을 먼저 읽고 다음으로 사서(四書)를 읽도록 했다. 그것은 효제충신의 도리를 먼저 알고서 다른 책을 읽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가르침에 있어서 부지런하면서도 엄격하였다. 실제 그의 동생인 성호 이익은 섬계 이잠이 사망한 후 이서에게 훈도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가학의 전통을 이익에게 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갈고 닦은 성리학적 학문 경향까지 전하였다고 보인다.

이서의 저술은 성호 이익이 서문을 작성한 『홍도선생집(弘道先生集)』으로 편찬되었으며, 그가 초학자를 위하여 성리학과 서예를 접목하여 저술한 『필결』은 조선 최초의 서예 이론서이다.

참고문헌

원전

『성재선생문집(性齋先生文集)』
『성호선생전집(星湖先生全集)』
『홍도선생유고(弘道先生遺稿)』

단행본

윤재환, 『옥동 이서의 삶과 시세계 그리고 성호학』(학자원, 2020)

논문

조민환, 「옥동 이서의 이기성정론과 서예인식– 퇴계 이황과의 관계를 중심으로」(『퇴계학논집』140, 퇴계학연구원, 2016)
전상모, 「이서 『필결』의 학술사상적 이해와 王羲之 인식」(『유학연구』29,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3)
조민환, 「옥동 이서의 서예미학사상」(『서예학연구』1, 한국서예학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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