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채(1631~1695)는 조선 후기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화숙, 호는 현석, 남계이며, 시호는 문순이다. 1659년 예송논쟁이 벌어지자 송시열 등과 함께 서인의 기년설을 찬성하였다. 1674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자 파직당하고 유배당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관직에 복귀하였다. 1684년 회니 시비로 인해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하자 소론의 편에 섰다. 1694년 갑술환국 때 복귀하여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이이, 성혼의 문묘 종사를 확정하고, 김육의 대동법을 확산시켰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 · 남계(南溪).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박의(朴猗)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그의 가계(家系)는 명문세족으로, 증조부 박응복(朴應福)은 대사헌, 할아버지 박동량(朴東亮)은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한 박세당(朴世堂)과 박태유(朴泰維) · 박태보(朴泰輔) 등은 당내간의 친족이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의 손자 송순석(宋淳錫)은 그의 사위이다. 그는 이러한 가계와 척분에 따라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국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정치현실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649년(인조 27)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1650년(효종 1) 이이 · 성혼(成渾)의 문묘종사 문제가 제기되자, 당시 영남유생 유직(柳稷)이 이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세채는 일찍이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로써 학문을 출발하였고, 이이를 존경하였기에 그 상소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批答) 속에 선비를 몹시 박대하는 글이 있자, 이에 분개하여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
1651년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박세채의 당숙 박호(朴濠), 백부 박미(朴瀰), 그리고 아버지가 일찍이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한 연유로 그의 사승관계(師承關係)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1659년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다. 그 해 5월 효종이 승하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크게 거론되었는데, 박세채는 3년설을 주장한 남인 계열의 대비복제설을 반대하고, 송시열 · 송준길(宋浚吉)의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며 서인 측의 이론가로서 활약하였다. 당시 박세채가 지은 『복제사의(服制私議)』는 남인 윤선도(尹善道) · 윤휴(尹鑴)의 3년설의 부당성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글이다. 박세채는 다시 서한을 보내어 윤휴를 꾸짖은 바 있는데, 이 서한을 계기로 두 사람의 교우 관계가 단절되는 원인이 되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기해복제 때에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 측의 여러 신하들이 다시 추죄(追罪)를 받게 되었다. 이에 박세채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양근(楊根) · 지평(砥平) · 원주 · 금곡(金谷)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였다.
박세채는 이 기간 동안 학문에 전념하여 『소학』 · 『근사록』 · 『대학』 · 『중용』을 중심으로 난해한 구절을 해설한 『독서기(讀書記)』를 저술하였다. 또한 『춘추』에 대한 정자(程子) · 주자(朱子)의 해설을 토대로 20여 문헌에서 보충자료를 수집하여 추가한 『춘추보편(春秋補編)』과 성리학의 수양론 가운데 가장 핵심개념인 경(敬)에 대한 선유(先儒)의 제설(諸說)을 뽑아 엮은 『심학지결(心學至訣)』 등을 저술하였다.
1680년(숙종 6) 이른바 경신대출척이라는 정권교체로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집의로부터 승정원동부승지 · 공조참판 · 대사헌 ·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1684년 회니(懷尼)의 분쟁을 계기로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박세채는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발표해 양편의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했으나, 끝내 소론의 편에 서게 되었다. 숙종 초기 귀양에서 돌아와서는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였으나, 노 · 소 분열 이후에는 윤증(尹拯)을 두둔하고, 소론계 학자들과 학문적으로 교류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에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생활을 하였다. 이때가 박세채의 생애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기는 학자로써 자질을 발휘한 시기이다. 이 기간 중에 윤증 · 정제두(鄭齊斗)를 비롯하여 이른바 소론계 학자들과 서신 왕래가 많았으며, 양명학(陽明學)에 대해 비판하고 유학의 도통(道統)연원(淵源)을 밝히려는 학문적 변화를 보였다. 『양명학변(陽明學辨)』 · 『천리양지설(天理良知說)』을 비롯하여 『이학통록보집(理學通錄補集)』 · 『이락연원속록(伊洛淵源續錄)』 ·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 『삼선생유서(三先生遺書)』 · 『신수자경편(新修自敬編)』 등은 이 시기에 저술한 중요한 저서들이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에는 정계의 영수격인 송시열이 세상을 떠나고, 서인 내부가 노론과 소론으로 양분된 상태였으므로, 박세채는 우의정 · 좌의정을 두루 거치며 이른바 소론의 영도자가 되었다. 남구만(南九萬) · 윤지완(尹趾完) 등과 더불어 이이 · 성혼에 대한 문묘종사 문제를 확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대동법의 실시를 적극 주장하였다.
박세채는 국내외로 다난한 시기에 태어나서 수난을 거듭하는 생활을 보냈다. 대내적으로는 당쟁이라는 정치적 대립이 격화된 시기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을 몸소 겪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라는 국제적 격동기였다. 즉, 중화적(中華的) 천하가 무너지고 이적(夷狄)의 국가 청나라가 천하를 호령하는 이른바 역천패리(逆天悖理)의 위기의식이 만연한 시기였다. 박세채의 공적인 활동이나 사적인 학문 생활은 이러한 시대정신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박세채의 학문은 당시 국내외 상황과 관련하여 네 가지 특성으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는 정치적으로 존주대의(尊周大義)의 입장과 붕당의 탕평론(蕩平論), 둘째는 학문의 계통을 분명히 하고 수호하는 일, 셋째는 이단(異端)을 비판하고 배척하는 일, 넷째는 사회규범으로써 예학(禮學)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박세채는 대외적으로는 오삼계(吳三桂)의 복명반청(復明反淸)의 거사를 알고, 이를 적극 지지하여 존주대의라는 정책과제를 제시했으며, 대내적으로는 파당적 대립의 폐단을 깊이 깨닫고 “이대로 방치하면 붕당의 화(禍)는 반드시 나라를 패망하게 하는데 이를 것이다.”라고 우려하여 탕평론(蕩平論)을 제시하였다.
존주대의의 정책과제는 스승 김상헌에게서 전수된 대외관(對外觀)이라 할 수 있으며, 중화적 세계가 무너지는 위기의식 속에서 도통수호(道統守護)라는 학문적 과제에 대한 간접적인 인과성을 발견할 수 있다. 박세채의 도통수호 의식은 그가 이미 『이학통록보집』을 저술하여 중국 유학의 학통을 밝히고, 그와 아울러 방대한 『동유사우록』을 써서 조선의 도학연원을 밝힌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박세채의 공적에 대해 제자 김간(金幹)은 “계개(繼開)의 공과 찬술의 풍부함은 참으로 근대 유현(儒賢)에는 없다.”라고 평하였다.
박세채가 이단을 비판하고 배척한 태도는 『양명학변』에 잘 나타나 있는데, 박세채는 여기에서 『고본대학(古本大學)』 · 『대학문(大學問)』 · 『치양지(致良知)』 · 『주자만년정론(朱子晩年定論)』 등 양명학의 이론을 낱낱이 비판하였다. 양명학에 대한 비판은 도통수호라는 입장에 근거한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박세채의 제자 정제두가 양명학을 신봉함으로써 사우(師友) 사이에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제두는 8년 전에 이미 『의고결남계서(擬古訣南溪書)』를 써서 “양명의 심설을 바꿀 수 없다.”라고 했고, 그 뒤 여러 사우 간에 논변이 있었던 만큼 정제두의 스승으로써 논변을 질정(質定)하는 뜻에서 이러한 저술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박세채의 많은 저술 가운데 예학에 관한 저술은 매우 큰 업적을 남겨 ‘예학의 대가’라고 칭할만하다. 『남계선생예설(南溪先生禮說)』 · 『육례의집(六禮疑輯)』 등은 예의 구체적 실천 문제를 다룬 서술로서 과거에 보지 못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식 절차까지 문제 삼고 있다.
이러한 예학의 변용은 17세기 성리학의 예학적 전개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며, 오륜의 근거를 밝히는 예학의 구현이라는 의미가 된다. 여말선초의 사상적 전환기에 제기되었던 불교의 멸륜성(滅倫性)을 극복하고, 예에 의한 실천 방법으로서 오륜은 매우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가례(家禮)』를 권장하고 『삼강행실도』 · 『국조의례』 등을 간행한 것은 일종의 범국민적 규범 원리로써 예 의식을 광역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비의 복(服)에 대해 기년복 · 삼년복을 주장하거나, 또는 대공(大功) · 기년이어야 한다는 이른바 예송(禮訟)은 당파적 대립의 성격을 띠기도 했지만, 문제는 대립의 성격이 예에 대한 기본 문제를 검토하는 데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대립적 성격은 분명히 예학의 구현이라는 유학의 기본 과제에 대한 새로운 검토이며, 예학적 전개라는 발전적 차원의 문제이다.
박세채의 예학적 전개는 『육례의집』 · 『변례질문(變禮質問)』 등에서 잘 나타나 있다. 박세채의 견해는 문인 김간의 『동방예설(東方禮說)』에 계승되었으며, 정제두의 글에서 고례(古禮)를 존중하고 간례(簡禮)를 강조하면서 이이 · 성혼과 더불어 박세채의 예설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박세채의 예설은 정제두에게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박세채의 대표적 저술은 『범학전편(範學全編)』 · 『시경요의(詩經要義)』 · 『춘추보편(春秋補編)』 · 『남계독서기(南溪讀書記)』 · 『대학보유변(大學補遺辨)』 · 『심경요해(心經要解)』 · 『학법총설(學法總說)』 · 『양명학변(陽明學辨)』 · 『남계수필록(南溪隨筆錄)』 · 『심학지결(心學旨訣)』 · 『신수자경편(新修自警編)』 · 『육례의집(六禮疑輯)』 · 『삼례의(三禮儀)』 · 『사례변절(四禮變節)』 · 『가례요해(家禮要解)』 · 『가례외편( 家禮外編)』 · 『남계예설(南溪禮說)』 · 『남계시무만언봉사(南溪時務萬言封事)』 · 『남계연중강계(南溪筵中講啓)』 · 『남계기문(南溪記聞)』 ·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 『주자대전습유(朱子大全拾遺)』 등이 있으며, 영인본으로 유포되고 있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