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고종 20) 임헌회의 문인 전우(田愚) 등이 편집·간행했으며, 부록은 1932년 김종학(金鍾學)이 간행하였다. 1937년 이인구(李仁矩)가 『전재문집(全齋文集)』이라는 제목으로 석판본 20권 10책을 간행했는데, 내용은 『고산문집』과 대동소이하며, 다만 편차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1985년 아세아문화사에서 『고산문집』을 대본으로 각종 부록과 아울러 영인·간행한 『임헌회전집』 5책이 있다. 이 문집에는 서문과 발문이 없다.
원집 20권 10책, 속집 4권 3책, 부록 3권 3책, 합 27권 16책. 목활자본. 규장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원집의 권1에 부(賦) 3편, 사(詞) 1편, 시 206수, 시여(詩餘) 4편, 권2에 소(疏) 17편, 계(啓) 21편, 의(議) 5편, 권3∼7에 서(書) 362편, 권8에 잡저 22편, 권9에 서(序) 15편, 기(記) 11편, 제발(題跋) 26편, 명(銘) 8편, 찬(贊) 6편, 권10에 혼서(昏書) 2편, 상량문 2편, 고축(告祝) 24편, 제문 19편, 권11∼15에 신도비명 2편, 비 5편, 묘갈명 22편, 묘지명 38편, 묘표 4편, 시장(諡狀) 1편, 권16∼18에 행장 26편, 권19에 유사 6편, 어록 3편, 권20에 전(傳) 15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속집의 권1에 시 16수, 소 1편, 서(書) 38편, 잡저 25편, 서(序) 6편, 기 12편, 제발 19편, 잠 3편, 명 10편, 찬 2편, 혼서 1편, 상량문 1편, 고축 2편, 제문 4편, 권2∼4에 신도비 1편, 묘갈명 30편, 묘지명 20편, 묘표 3편, 시장 1편, 행장 9편, 전 3편, 부록의 권1∼3에 연보·가장(家狀)·행장·신도비명·묘지명·사제문·제문·어록·집촉록(執燭錄)·제가기술(諸家記述)·유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부·사·시 등은 서정적인 작품보다 학구 생활과 관련된 소재가 많다. 부의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는 1840년(헌종 6)에 지은 작품으로 중국 도잠(陶潛)의 「귀거래사」 체제를 그대로 본받아 저자 자신의 출처에 관한 뜻을 담은 명문이다.
소는 「사이조참판겸진소회소(辭吏曹參判兼陳所懷疏)」를 비롯하여 대부분이 사직소이지만, 격동기에 유자(儒者)로서 시국관이 어떠하였는지 살필 수 있다. 계는 주로 별유후서계(別諭後書啓)이다. 의의 「당저사위후중궁전진호위대비전의(當宁嗣位後中宮殿進號爲大妃殿議)」·「대왕대비왕대비복제의(大王大妃王大妃服制議)」 등은 국가의례에 관한 자문에 답한 내용이다.
서(書)는 그의 스승인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을 위시하여 김매순(金邁淳)·홍석주(洪奭周) 및 사우(士友) 조병덕(趙秉悳)·신응조(申應朝)·홍일순(洪一純)·김평묵(金平默)·이응진(李應辰)·소휘면(蘇輝冕), 그리고 문인 전우·서정순(徐政淳)·윤치중(尹致中) 등과 주고받은 것으로, 주로 경전·예설(禮說)·성리설·태극·심성(心性)·이기(理氣) 등에 관한 논술이 많다. 특히,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김평묵과 왕래한 서한은 ‘명덕(明德)’에 대한 기본적 견해가 명덕주기설(明德主氣說)과 명덕주리설(明德主理說)로 차이를 나타내면서 새로운 학파적 논변으로 발전되었다.
그가 명덕을 심(心)으로 파악한 점은 화서학파와 같은 입장이었지만, 그는 “명덕이 중리(衆理)를 갖추고 있으며 만사(萬事)에 응한다.”는 점을 심(心)의 체(體)와 용(用)으로 파악하였다. 그에 의하면, 명덕은 비록 형이하(形而下)이지만, 갖추어져 있는 바의 이(理)는 곧 형이상이다. 그런 점에서 심(心)은 형이하라고 말할 수 있지만, 갖추어져 있는바 소이연(所以然)으로 말한다면 형이상으로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명덕주리·주기의 분별은 명덕의 유위(有爲)·무위(無爲)의 여부를 관찰하여보면 알 수 있는데, 이(理)가 정의(情意)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관찰하여보면, 명덕은 정의가 있고 지각(知覺)이 있는 물사(物事)이며, 이(理)는 단지 정의와 지각이 없는 물사이다. 따라서 명덕은 주기적인 입장에서 파악해야 되는데, 주기적인 입장이 이(理)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심(心)을 이(理)로 파악하는 김평묵 등의 논의는 기(氣) 위에 나아가 이(理)를 파악하지 않고, 오로지 명덕에 갖추어져 있는 이(理)와 명덕의 허령불매(虛靈不昧: 마음이 거울같이 맑고 영묘하여 무엇이나 뚜렷이 비추어 일체의 대상을 명찰함)한 상태를 함께 이(理)로 파악하는 모순을 범했다고 지적하였다.
조병덕에게 답한 서한에서는 「맹자」의 ‘생지위성(生之謂性)’에 대해 “생한 것을 성(性)이라고 이른다는 말은 대체로 생하기 전에는 성을 말할 수 없으며, 생이 있는 후에야 비로소 성이라 말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잡저 가운데 「이계(二誡)」는 부모의 상례(喪禮)를 성경(誠敬)으로 하고, 내외(內外)를 엄하게 해서 가도(家道)를 바르게 하라는 가법을 전하고 있다. 「예의쇄록(禮儀瑣錄)」은 당시 시행되고 있던 상제례(喪祭禮)의 불합리한 점을 논한 것이며, 「제찬도설(祭饌圖說)」·「거상의(居喪議)」·「조주체봉의(祧主遞奉儀)」·「조주매안의(祧主埋安儀)」 등에서는 상제의식(喪祭儀式)에 관한 해설과 도식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간서잡록(看書雜錄)」·「경의쇄록(經義瑣錄)」은 경전상의 난해한 어구에 대하여 제현의 설을 인용하고 고증·분석하였다. 「매산선생어록(梅山先生語錄)」은 홍직필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평소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전 가운데 「화망건선생전(畫網巾先生傳)」은 명나라가 멸망한 뒤 춘추대의를 지켜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망건선생의 일화를 기록한 글로, 조선 후기 위정척사론자(衛正斥邪論者)의 대명관(對明觀)을 알 수 있는 글이며, 또한 저자 자신이 대명유민(大明遺民)으로 자처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문집은 임헌회의 사상과 시국관·출처관 등, 19세기 당시 기호유림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