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저자가 초고를 직접 수정하여 『간재사고(艮齋私稿)』라 명명하고 자서를 붙였다. 그 뒤 1927년 문인 김정호(金楨鎬)·오진영(吳震泳) 등이 편집한 진주본(晉州本: 신연활자본)과 이인구(李仁矩)·최병심(崔秉心) 등이 편집한 신도본(新都本: 목판본)이 동시에 간행되었다. 이 세 종류는 편차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내용은 별로 차이가 없다.
별집은 원집이 편간될 당시는 일제치하였기 때문에 배일에 대한 글은 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소(疏)를 비롯한 배일에 대한 글을 따로 모았다가, 1929년오진영이 남신하(南信夏)를 시켜 중국 상해에서 별집을 간행하고 『추담별집(秋潭別集)』이라 이름 붙였다. 추담은 전우의 별호이다.
전우의 문집은 1975년김형관(金炯觀)·성구용(成九鏞) 등이 편집한 화도본(華島本)이 『전우전집』이라는 제목으로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되었고, 1984년 보경문화사에서 『간재전집』으로 축쇄·영인되었다.
목록 1책, 원집 43권 21책, 속편 16권 8책, 추담별집 15권 8책, 합 74권 38책. 목판본·신연활자본. 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원집의 권1∼26에 서(書) 2,890편, 권27∼37에 잡저 310편, 권38·39에 서(序) 36편, 기 23편, 제발(題跋) 49편, 명 39편, 잠 1편, 찬 8편, 자사(字辭) 1편, 고축(告祝) 4편, 제문 32편, 상량문 1편, 권40에 신도비명 3편, 비(碑) 3편, 묘표 4편, 묘지 4편, 행장 6편, 전(傳) 1편, 시 125수, 권41에 대학기의(大學記疑)·중용기의(中庸記疑), 권42·43에 주자대전표의(朱子大全標疑), 속편의 권1∼8에 서(書) 1,202편, 권9∼13에 잡저 220편, 서(序) 51편, 기 36편, 제발 133편, 명 25편, 송(頌) 1편, 잠 3편, 찬 9편, 자사 5편, 혼서(婚書) 4편, 고축 2편, 제문 18편, 권14에 신도비명 1편, 묘갈명 16편, 묘지명 8편, 묘표 8편, 권15에 시장(諡狀) 1편, 행장 10편, 행록 4편, 전 15편, 권16에 어록 4편, 시 97수, 추담별집의 권1·2에 소 3편, 서(書) 132편, 권3·4에 잡저 44편, 서(序) 3편, 기 4편, 발 12편, 명 1편, 찬 2편, 고축 8편, 제문 6편, 시 16수, 예설(禮說) 6권, 척독(尺牘) 5권, 부록으로 연보·가장·행장·묘갈명·관선록(觀善錄)·유묵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書)는 주로 사문(師門)·지구(知舊)·동문(同門)·문인들과 왕복한 것으로, 그의 스승 임헌회(任憲晦)를 비롯하여 조병덕(趙秉德)·신응조(申應朝)·최익현(崔益鉉)·유중교(柳重敎)·김평묵(金平默) 등과 주고받은 총 4,224편의 방대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별지(別紙)에는 주로 성리학설·경전·예학설·강상론(綱常論)·의리론 등에 대한 논술이 많다. 조선시대 학자들의 학문적 연구 성과는 일반적으로 서한문을 통해 발표되는 것이 상례이므로, 별지는 학문적 의미에서 매우 큰 비중을 가지고 있으며, 학자로서의 학구적 태도는 물론이고 교육자로서도 성실한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잡저 총 574편은 주로 성리학적 과제에 대해 독자적인 연구와 비판을 제기하고, 성리학의 체계를 구성하는 논제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학술사적·사상사적 의미를 지닌다. 한말의 심성이기설(心性理氣說)에 있어서 그는 성품을 이(理)라 하고, 마음을 기(氣)라 규정한 기호학파의 전통적 해석을 고수하며 당대의 여러 학자들과 왕성한 논변을 전개하였다.
「외필변(猥筆辨)」·「납량사의의목(納凉私議疑目)」에서는 기정진(奇正鎭)이 기호학파의 배경 속에서 마음을 이로 보아 유리론(唯理論)을 주장한 것에 대해 이이(李珥)의 학설에 어긋난 점을 지적하는 한편, 자신의 성리학적 이념을 천명하여 조목별로 엄정하게 분석·논박하였다. 「화서아언의의(華西雅言疑義)」·「심설정안변(心說正案辨)」에서는 이항로(李恒老)가 본심(本心) 내지 명덕(明德)을 이(理)로 파악한 것을 지적하고, 마음과 명덕을 기로 규정한 자기의 견해를 조목별로 논변하고 있다.
「이씨심즉리설조변(李氏心卽理說條辨)」에서는 이진상(李震相)이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하며 심즉기설(心卽氣說)은 전통적인 학설이 아니라 근세 유현들의 학설이라고 지적하자, 이를 낱낱이 들어서 정주(程朱)의 학설임을 밝히는 한편, 심즉리설이 원리에 어긋난 점을 조목별로 들어 비판하였다. 「성존심비적거(性尊心卑的據)」에서는 그가 주창한 성리학 과제인 성품을 높이고 마음을 낮춘다는 성존심비설을 공자와 주자의 학설에 나타나 있는 문맥을 낱낱이 증거로 들어 자신의 논리가 명확함을 제시하였다.
「성사심제독계어(性師心弟獨契語)」는 심성학설에 대한 그의 독특한 창작명제로, 성과 심을 스승과 제자에 비유하여 성품은 스승처럼 높이고 마음은 제자처럼 낮춘다는 성사심제설에 대한 출전을 밝히고, 경서의 수천만어가 모두 이 이치를 발명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강조하여, 도학을 바탕으로 성리학의 체계를 명백히 구현하고 있다. 「기질체청설(氣質體淸說)」은 기질의 본체가 미발(未發)할 때에는 청수(淸粹)하다는 논설이다. 이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낙론계(洛論系)의 학설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분언(㤓言)」에는 심성이기에 대한 논변, 출처에 관한 본의, 예의·경제에 대한 언론 등 337칙이 수록되어 있다. 「해상산필(海上散筆)」에는 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체험한 문헌자료 690조가 수록되어 있다. 「화도만록(華島漫錄)」에서는 주로 학문을 연구하는 고금학술(古今學術) 및 유속(流俗) 등 178편의 다양한 제목을 붙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추담별집』의 「인변란소(因變亂疏)」는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격분하여 올린 글이다. 일본은 우리 민족의 영원한 원수임을 밝히고, 이 조약에 서명한 오적을 매국노로 규정하며, 이들의 목을 베어 신인(神人)의 분노를 씻을 것을 촉구하였다. 「재소(再疏)」 2편에서는 을사조약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려는 흉계임을 역설하고, 만약 이 조약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영 독립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봉동국인입서(奉同國人立誓)」와 「경세문(警世文)」에서는 우리 민족이 받고 있는 국치의 수모에 대하여 통탄하고,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알면서도 국력의 약세로 인해 당장에는 보복할 수 없으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기회를 엿보아 국권회복을 도모하는 한편, 선비들은 유학의 본질을 고수하여 혹시라도 그들에게 붙어서 일신상의 사욕을 꾀하려다가 후세에 오명을 남기는 일이 없도록 다 같이 맹세할 것을 촉구하였다.
『예설 禮說』 6권은 문인 권순명(權純命)이 스승의 예설을 분류·편집한 것으로서, 관혼상제로부터 국례(國禮)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예학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부록의 「관선록」은 문인록으로서 제주도로부터 북간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3,000여 명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이 문집은 성리학설의 전통적 문제점이나 동시대의 쟁점에 깊이 천착하고 관여한 조선시대 성리학사의 마지막 문헌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말 성리학의 다양한 구성 속에서 일각의 도학적·철학적 체계를 뚜렷하게 밝혔으며, 한말의 유학자가 대처하던 일관된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유학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