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田愚: 1841~1922)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초기에 활동한 성리학자이자 도학자로, 낙론 계열 학자로 분류된다. 본관은 담양(潭陽)이며,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간재(艮齋)다. 『추담별집』, 『연원정종』, 『간재집(艮齋集)』 등을 저술하여 인성과 물성에 관한 문제를 탐구했으며, 전통적 도학(道學)의 부흥을 통해 국권 회복을 이루고자 노력했다. 1908년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왕등도와 군산도로 들어가 학문에 정진했으며, 1912년부터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한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
전우는 주자학적 성리학을 계승하며 ‘심본성설(心本性說)’을 주장, 성이 천리이고 마음은 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통해 주희(朱熹)의 학설을 새롭게 해석했다. 그는 이이와 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했으며, 도학을 통한 국권 회복을 강조했다.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의병 참여나 적극적 독립운동에는 소극적이었다는 비판도 받았으나, 그의 성리학적 공헌은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조선 유학의 마지막 대가로 인정받고 있다.
『간재집』은 1927년 논산 용동에서 간행된 목판본으로, 총 5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고, 후고, 재후고, 별고로 나뉘며, 간재 전우의 제자들이 편집에 참여했다. 소장처는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등이다. 이와 별도로 1924년에 필사된 『간재사고(艮齋私稿)』[화도(華島) 수정본], 1925년 활자로 간행된 『간재사고』(진주본)가 전한다. 이 3종은 편차에 약간 차이가 있으나 수록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다.
전우는 자신의 글을 ‘사고(私稿)’라는 이름으로 정리했으며, 60세 전후부터 문인들이 초고 정리와 편집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1902년에 문인 오진영(吳震泳)이 이 작업에 참여했고, 1906년에는 문인 김준영(金駿榮)이 초고를 문고(文稿) 36책으로 정리했다. 1912년에는 여러 제자들이 다시 편집에 참여하고, 저자 본인이 직접 산정하여 25책으로 정리한 뒤 ‘전고(前稿)’라 했다. 1913년 이후부터 작성된 글을 1921년에 정리하여 ‘후고(後稿)’로 편찬했으며, 1922년 저자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긴 글을 다시 모아 ‘재후고(再後稿)’로 정리했다. 이런 경위를 거쳐 저자의 저술은 전고, 후고, 재후고로 나뉘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저자 사후 자손들과 제자들이 문집 간행에 대해 논의했으나, 간행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는 저자인 전우가 생전에 자손들과 문인들에게 “일제(日帝)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자신의 문집을 간행하지 말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라는 대외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제자들 사이에서는 스승의 유지를 지켜야 한다는 의견과 문집 간행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대립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결국 저자의 문집은 몇 종으로 나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저자의 제자 가운데 최병심(崔秉心: 18741957)과 김택술(金澤述: 18841954)은 정리된 전우의 원고를 필사하기로 했다. 1924년 7월에 필사를 마쳐, 전고 13책, 후고 12책, 재후고 3책, 별고 1책 등 총 29책으로 구성된 『간재사고』[화도 수정본]를 완성했다. 이어 1925년 10월에는 오진영과 권순명(權純命) 등이 진주(晉州)에서 활자를 사용해 『간재사고』[진주본] 30책을 간행했는데, 이 판본이 저자 문집의 초간본이다.
이와는 별도로 1925년 겨울부터 저자의 장손 전일효(田鎰孝)와 손녀사위 이인구(李仁榘)가 문집 간행을 준비하여, 1927년에 논산(論山) 용동(龍洞)에서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했다. 이 목판본이 『간재집』[용동본]이다.
『간재집』은 전편(前編) 17권, 전속편(前編續) 6권, 후편(後編) 22권, 후속편(後編續) 7권, 별편(別編), 사차(私箚) 등 총 52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문집으로, 저자의 시문뿐 아니라 학문적 · 사상적 성과를 집대성한 저술이다. 문집의 구성은 편집 시점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권차별로 설명하기보다는 전체적인 체제와 시문의 성격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간재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서간문[편지글]의 비중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실제도 문집의 편집에서도 서간문을 의도적으로 앞에 배치하고, 여타 시문은 그 뒤에 실었다. 이는 저자가 서간을 통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현실을 논하고, 학문적 주제를 깊이 있게 교류했던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책에는 스승, 동문, 문인들과 주고받은 4,000여 편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성리학 논변, 경전 해석, 예학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학문적 논쟁과 교류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임헌회(任憲晦), 조병덕(趙秉悳), 신응조(申應朝), 유중교(柳重敎), 김평묵(金平默) 등과의 서신은 저자의 성리학적 이념 실천과 학문적 깊이를 잘 보여 준다. 전우의 편지글은 단순한 사적 교류를 넘어, 그의 학문적 발전 과정과 시대적 책임감을 드러내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는 서신을 통해 성리학의 핵심 주제인 성(性)과 심(心)의 관계, 예학적 문제, 경전 해석 등에 대해 깊은 논의를 이어가며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정립하기도 했다. 이는 구한말 학문적 교류 방식과 성리학적 논쟁의 일면을 잘 보여 주는 귀중한 사료다.
잡저는 총 500여 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성리학적 주제에 대한 연구와 비판적 논의가 포함되어 있다. 주요 문체로는 변(辨), 설(說), 논(論), 문답(問答) 등이 있으며, 이는 특정 학술 주제에 대한 저자의 논리적 견해를 담은 논변류에 해당한다. 대표적으로는 기정진의 유리론(唯理論)을 비판한 「외필변(猥筆辨)」, 이항로의 명덕설(明德說)을 반박한 「화서아언의의(華西雅言疑義)」, 이진상의 심즉리설을 비판한 「이씨심즉리설조변(李氏心卽理說條辨)」 등이 있다. 이들 논변을 통해 저자의 학문적 입장과 성리학 내 논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성리학에서 성(性)과 심(心)의 관계를 해석하며, 성존심비설(性尊心卑說)과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을 주장했다. 「성존심비적거(性尊心卑的據)」에서는 공자와 주자의 학설에 근거하여 성품을 높이고 마음을 낮춘다는 논리를 전개했고, 「성사심제독계어(性師心弟獨契語)」에서는 성을 스승, 심을 제자로 비유하여 성리학적 체계를 정립하고자 했다. 또한, 「기질체청설(氣質體淸說)」에서는 기질이 청수하다는 논리를 펼쳤으며, 이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한 낙론계 학설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저자의 시대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는 상소문이 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인변란소(因變亂疏)」라는 제목의 상소와 그 후속 상소를 올려, 을사오적(乙巳五賊)을 매국노로 규정하고 이들을 처벌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러한 상소문은 저자의 민족적 책임감과 일제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잘 보여 주며, 성리학적 학문을 바탕으로 현실 참여에 나섰던 지식인의 면모를 드러낸다.
문집 전체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은 작지만, 저자는 전통적인 시문 창작에도 능했다. 서(序), 기(記), 명(銘), 제문(祭文), 행장(行狀) 등 다양한 문체의 한문 산문을 남겼고, 200여 수의 한시를 남기기도 했다.
『간재집』은 성리학설의 전통적 문제점과 동시대의 학문적 쟁점에 깊이 천착하고 관여한 조선 후기 성리학사의 맥락을 잘 보여 주는 중요한 문헌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유학자로서 일관된 신념과 현실 참여를 동시에 지향했던 저자의 지식인적 면모는 오늘날에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