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재 전우 초상화 ( )

회화
유물
문화재
조선 말기의 학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그린 20세기 초 초상화.
정의
조선 말기의 학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그린 20세기 초 초상화.
개설

2013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초상화가 채용신(蔡龍臣)은 전우가 80세인 1920년에 초상화 한 본을 그렸다. 이때 그린 것을 모본으로 하여 같은 해에 한 본을 더 베껴 그렸는데, 이것이 경상남도 김해 월봉서원(月峯書院)에 봉안된 전우의 초상화이다.

전우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서 본관은 담양(潭陽), 초명은 경륜(慶倫) 또는 경길(慶佶)이며, 자는 자명(子明)으로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로 불렸다. 전우의 초상을 봉안한 월봉서원은 월헌(月軒) 이보림의 학문을 기리기 위해 1972년에 건립되었다. 구한말의 우국지사를 즐겨 그린 채용신이 1920년에 전우가 살던 계화도(界火島)를 방문하여 전우의 초상화를 그렸다. 채용신이 쓴 『석강실기(石江實記)』에 기록된 사실이다. 이때 그린 전우의 초상이 이후 여러 이모본의 원본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월봉서원에 봉안된 전우 초상은 1920년에 그린 원본을 보고 다시 모사(模寫)한 것인데, 원본과 이모본에서 모두 채용신의 초상화법을 확인할 수 있다.

내용

전우가 장보관(章甫冠)에 황색포를 입고 공수(拱手) 자세로 꿇어앉아 정면을 응시한 모습이다. 초상의 왼편 중단에는 “庚申夏五月上澣從二品 前府使 蔡石芝摹寫(경신하오월상한종이품 전부사 채석지모사)”라고 적혀 있고, 양각한 방인(方印)의 “석지(石芝)”, 음각한 방인의 “채용신장(蔡龍臣章)”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이를 통해 1920년에 초상화가 채용신(蔡龍臣)이 이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전우의 초상화 이모본은 전국에 여러 점이 전하고 있다.

월봉서원의 전우 초상을 그릴 당시 전우는 80세, 채용신은 73세였다. 월봉서원의 전우 초상은 노년기 화가의 그림이라 하기에 놀라울 정도로 세밀한 묘사가 뛰어나다. 채용신은 구한말에 활동한 화가로 극세필을 사용한 독특한 초상화법을 창안하였다. 그의 초상화에 나타난 특징은 세필을 사용하여 피부의 모공(毛孔)까지 그려낼 정도의 극사실 묘사, 수많은 필선으로 요철과 명암을 표현한 점, 정면관을 선호한 점, 돗자리가 항상 깔린 점 등을 들 수 있다. 배경 부분은 여백으로 남기지 않고 음영을 줌으로써 신체가 배경의 공간 속에서 분리되는 효과를 주었다. 상복(喪服)과 백관(白官)을 착용한 이 초상화는 1919년 1월에 붕어(崩御)한 고종의 3년상을 치르는 전우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전한다.

의의와 평가

채용신이 그린 간재 전우의 초상화는 여러 점이 전한다. 동일한 초본(밑그림)을 갖고 그린 사례들이다. 월봉서원의 전우 초상은 채용신이 73세이던 1920년에 그린 이모본이지만, 그의 치밀하면서도 완숙한 초상화법이 잘 나타나 있다. 대상 인물을 직접 마주하여 원본을 그린 뒤, 그 원본을 토대로 다시 그린 이모본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한국의 초상화, 형과 영의 예술』(조선미, 돌베개, 2009)
집필자
윤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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