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안(士安), 호는 백석(白石). 박동선(朴東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참판 박정(朴炡)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박세당(朴世堂)이며, 어머니는 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평강현(平康縣) 관아(官衙)에서 태어났다.
1666년(현종 7)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1년(숙종 7) 태릉참봉(泰陵參奉)이 되었다. 같은 해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검열(檢閱)·병조좌랑 등을 거쳐 경기도사를 역임하였다.
그 해 가을 호조(戶曹)에서 농사일을 조사할 때, 각 고을에서 일을 맡은 자들이 사실 조사를 꺼려 임의대로 한두 경우만 조사해 보고하였다. 이에 박태유는 “명령을 받고 앉아서 살피는 것은 옳지 않다.”하고 모두 조사해 부실한 보고를 한 수령 5, 6인을 파면시켰다.
조사가 끝난 뒤 각 고을의 농사 피해 보고가 사실과 다르고, 농사도 전년보다 잘 되지 않았으므로 세미(稅米)를 줄이도록 상소해 춘추세(春秋稅)의 각 반을 감면받았다.
그 해 겨울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을 때, 어영대장(御營大將) 김익훈(金益勳)이 역모를 밀고했으나 심문한 결과 무혐의로 드러났다. 그러자 지평(持平) 유득일(柳得一)과 함께 김익훈을 탄핵하였다.
이러한 탄핵이 임금을 거슬러 거제현령(巨濟縣令)으로 좌천되었으나 곧 복직되었다. 뒤에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되었으나 낮은 직위에도 거리낌없이 남병사(南兵使) 이하를 모두 탄핵하였다. 감사의 잘못도 규탄해 감사가 스스로 사직하였다.
임금이 상관을 지나치게 규탄한다고 여겨 평안도찰방으로 이직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원래 건강하지 못한데다가 고산(高山)의 기후도 맞지 않아 병이 악화되자, 1695년(숙종 21) 병으로 사직하였다.
효성이 지극하고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글씨로는 철원의 김응하묘비(金應河墓碑)·영상신경신비(領相申景愼碑)·해백박동열비(海伯朴東說碑)·길목박동망갈(吉牧朴東望碣) 등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