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변록』은 조선 후기 주자학자 박세당이 유교 경전을 해석한 주석서이다. 처음에는 『통설』로 불리다 후에 『사변록』으로 개칭되었다. 주자학적 유교 경전에 대한 비판적 견해로 인해 우암 송시열의 후학인 김창협 등에게 사문난적으로 비판받았으며, 그러한 인식의 연장선에서 윤휴와 함께 조선 후기 실학적 경전 해석의 선구로 받아들여졌다. 근래 연구를 통해 『사변록』은 저술 동기와 격물치지 등에 대한 해석, 「대학」 본문의 재배열 등의 측면에서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몰거나 탈·반 주자학자로 평가할 근거는 없는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叟) · 서계초수(西溪樵叟) · 서계(西溪)이다. 경전 해석에서 비판적 주자학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였다. 30대에 장원으로 과거에 급제한 이후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역임한 관료로서의 삶을 구가하였다. 40세 이후 수락산의 석천에 깃들어 살며 농사와 강학으로 여생을 보내면서 농업서 『색경(穡經)』과 경전에 대한 주석서 『사변록』을 저술하였다. 『사변록』은 『대학』[52세]을 시작으로 『중용』[59세], 『논어』, 『맹자』[61세], 『상서』[62세], 『시경』[65세 시작]으로 이어졌으며 『시경』은 건강의 악화로 「소아 채미」 편에서 중단되었다.
그는 불교의 승려들과도 친분을 쌓았으며, 『노자』와 『장자』에 대한 주해서를 제출할 정도로 폭넓은 사유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벽이단에 대한 의식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보유(補儒)적인 측면으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고, 기본적인 지향은 진지한 유가였다.
처음에는 『통설(通說)』로 불렸으며, 후에 『중용』의 학문 단계로서 제시된 ‘신사(愼思)’, ‘명변(明辨)’에서 유래하여 ‘신중하게 생각하고 밝게 분변하여 기록한다’는 의미로 『사변록(思辨錄)』으로 개칭되었다. 총 14책으로 1책에 『대학』, 2책에 『중용』, 3책에 『논어』, 4·5책에 『맹자』, 6∼9책에 『상서』, 10∼14책에 『시경』 등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박세당은 경전 연구의 두 가지 폐단은 이단에 빠지거나 전대의 전적을 고수하는 데 있다고 주1 아울러 경전 연구는 “먼 곳을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데로부터 한다.”는 『중용』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얕고, 소략하고, 거친 데서부터 시작하여 심오하고, 구비되고, 정밀한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2 가까워야 도달하기가 쉽고, 얕아야 헤아리기가 쉬우며, 소략한 것은 얻기 쉽고, 거친 것은 알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점차적으로 깊고, 구비되고, 정밀한 곳까지 나아가야 주3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52세 때에 저술한 『대학사변록』에서는 편간(編簡)과 자구(字句) 가운데 뒤섞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전주(箋註)의 해설 가운데 그릇된 것을 변론했는데, 특히 ‘첨피기욱(瞻彼淇澚)’과 ‘전왕불망(前王不忘)’ 두 구절의 문리에 대해 고심하여 이 두 단락을 제10장인 평천하장(平天下章)의 뒤로 옮겨 놓았다. 이것은 정자(程子)의 고찰과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59세에 저술한 『중용사변록』에서는 『중용』이라는 책의 유래와 성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곧 그 책이 원래 『예기』에 속했으며, 『예기』는 한나라 선비가 분서갱유(焚書坑儒) 이후 주워 모아 편집한 것으로 착간이 많으니 『중용』과 『대학』에도 이러한 사례가 있을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비판을 거침없이 제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주자 전후로 착간을 조정하려는 노력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대학』과 달리 『중용』은 강목(綱目)이 따로 있어 단락을 분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장간(章簡)까지 바꾸지는 못했다고도 짚었다. 해석적 특징으로는 관념적이고 이론적이며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실제적이고 실천적이며 형이하학적 차원에서 규명하였다.
61세에 완성한 『논어사변록』과 『맹자사변록』의 특징은 수사학(洙泗學) 본연의 ‘구체적 실천성’과 ‘능동적 작위성’을 일관되게 강조하였다. 주요한 개념들에 대한 해석은 물론 경전 본문의 착간과 자구에 대해서 고증하고, 경문 자체의 신빙성이나 역사적 맥락을 검토하며 생활세계에서의 실질적 적용에 대한 입장 표명으로 그 해석적 관점을 유지하였다.
박세당은 『상서』의 문장이 간결하고 뜻이 심오하긴 하나, 자세히 궁구하면 그 해석이 어렵지 않다고 보았다. 반면 『시경』의 시는 처음부터 어떤 의도로 지어진 것인지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내용을 반복해 살펴보아도 끝내 작자의 본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고 토로한 바 주4 그는 후인들이 시의 내용을 근거로 주제를 추정하는 방식은 본래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작자의 의도를 중시하고 경전의 본의(本意)와 진실을 추구하려는 박세당의 경전 해석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 준다.
『상서사변록』에서 박세당은 주희가 말한 천리(天理)로서의 이법천(理法天)보다는, 선진 유학의 정신에 가까운 인격적 요소가 강조된 상제천(上帝天)의 개념을 보다 중시하였다. 그는 현실의 군주에게 면학과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상서』에 나타난 지리, 치수, 천문 등의 주제들은 결국 농업을 중심으로 한 민생 문제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나아가 민생을 도모하는 것이 『상서』의 핵심 가치라고 주장하였다.
『시경사변록』은 모시(毛詩)와 삼가시(三家詩)의 해석을 수용하면서, 한(漢) · 송(宋) 시대의 훈고학적 해석과 의리적 해석을 모두 아우르되, 그중에서도 옳다고 판단되는 해석을 취하고, 본문 중심의 정감적 해석을 시도한 점이 특징이다. 아울러 그 해석적 관점은 현실의 지평 위에서 성왕의 정치를 기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시에 대한 인식은 청대 학자 요제항(姚際恒)의 견해와도 일정한 친연성을 지닌다. 다만, 모시의 시야를 따름으로써 시를 지나치게 교화적으로 해석한 점, 정감의 차원에서 해석함으로써 일부 객관성이 결여된 점, 주자의 『시집전』을 보완하려 하였으나 그 비판이 정밀하지 못한 점 등은 한계로 지적된다.
주자학적 유교 경전에 대한 비판적 견해로 인해, 우암 송시열의 후학인 김창협 등으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서, 그는 백호 윤휴와 더불어 조선 후기 실학적 경전 해석의 선구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사변록』의 저술 동기, 격물치지(格物致知) 등에 대한 해석, 그리고 「대학」 본문의 재배열 등 여러 측면에서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몰거나 ‘탈(脫) · 반(反) 주자학자’로 평가할 근거는 없다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박세당은 만년에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을 지으면서 송시열의 인물됨을 비판한 것으로 해석되는 구절을 남겼고, 이에 송시열의 후학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사문난적으로 낙인찍혔다. 그 결과, 그는 이후 주자학을 공고히 해 온 조선 학계에 맞서는 실학적 성과의 상징으로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박세당이 주자와 견해를 달리한 부분은 적지 않지만, 이는 주자의 해석에 대한 반발이라기보다 경전을 정확히 해석하려는 지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입장을 ‘주자학’이냐 ‘반주자학’이냐의 이분법적 시각에서 판단하기보다는, 경전 주석에 대한 주석자의 학문적 태도와 관점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