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에 대한 외경심은 보본사은(報本謝恩)의 윤리적 측면과 양화초복(襄禍招福)의 종교적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나의 어버이를 낳아 기르신 조부모, 조부모를 낳아 기르신 증조부모, 이렇게 이어진 조상 전체를 추원경모(追遠敬慕)하는 것은, 나를 직접 낳아 길러준 어버이에 대한 효심의 연장이자 은혜 갚음이다.
조상의 몸은 비록 죽어 없어졌지만 그 영혼은 남아 있다고 생각하여 신위(神位)를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올린다. 돌아가신 날을 불길한 날로 꺼린다는 뜻에서 ‘기일(忌日)’이라 하고 기제(忌祭)를 차려 애도의 정을 표한다. 또한 철이 바뀔 때마다 새 곡식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천신(薦新)을 하고 명절에는 차례(茶禮)를 지내는 것도 조상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다.
종교적 측면에서 경조사상은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부르는 ‘양화초복’의 관념을 바닥에 깔고 있다. 인간의 유한한 생명과 제한된 능력에 비해 욕구는 무한하기 때문에 갈등과 어려움에 봉착하는데, 종교적 신앙은 그 해결을 전지전능한 초월자에게 간청한다.
그런데 유가는 인간의 바람을 조상신에게 의뢰한다. 이른 아침 목욕재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사당에 들러 신위를 배알하는 것은 일정한 성소(聖所)에 나아가 행해지는 다른 종교의 예배의식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숭배의 대상이 조상신이라는 점만 특이할 뿐이다. 『예기』에서 공자는 “제사를 지내면 복을 받는다.”, “제사에는 기원(祈願)이 있고 보답(報答)이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경조사상에는 ‘추원경모’와 ‘기복적 신앙(祈福的信仰)’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중국에서는 상고시대 순(舜)이 종묘(宗廟)를 두어 조상을 숭배하자 대효(大孝)로 일컬어졌고, 무왕·주공은 조상의 뜻[志]을 잘 받들고 조상의 업적을 훌륭히 이었다 하여 달효(達孝)로 불렸다.
이렇게 확립된 조상숭배의 전통은 이후 개인적·사회적 생활의 전 영역에 걸쳐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위로는 제왕에서 아래로는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수기치인(修己治人)과 화민성속(化民成俗)의 덕목으로 널리 호응을 받았다. 왕은 종묘를 세워 선왕을 흠모하고 그 유업을 기렸으며, 사대부는 가묘(家廟)를 세워 선조를 경모하였다. 일반 서민들은 비록 사당은 없었지만 조상에 대한 보본사은을 더욱 깊이 새기면서 친족간의 화목이라는 좋은 습속을 다져나갔다.
우리나라에서 경조사상은 유교가 사회·문화 전반을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와서 강화되었다. 주자(朱子)의 『가례』를 정례(正禮)로 채택하여 종가마다 사당을 짓고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등 체계적인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가례』에 의하면, 사당은 정침(正寢: 제사나 일을 잡아하는 몸채의 방)의 동쪽에 설치하고 당내에 큰 일이 있으면 나아가 소고(昭告 : 조상에게 아룀)한다. 재난을 당하면 무엇보다 신위와 유품을 옮기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였다. 그리고 사당을 중심으로 구성단위가 대가족이 됨에 따라 종가우위와 남아선호의 풍조가 자리잡았다.
또한 고조를 중심으로 한 당내의 결속과 불천위를 중심으로 한 씨족 내의 결속을 바탕으로 선조의 문집을 간행하고 가풍을 유지·계승함으로써 구성원의 소속감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경조사상의 그늘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가족적 이기주의가 씨족 상호간의 지나친 경쟁과 파벌의식을 조장해온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조상숭배의 부정적인 기능에도 불구하고 씨족 내부의 유대를 전체 사회로 확산시키고, 몇몇 불합리한 부정적 요소를 제거한다면 소외가 만연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경조사상은 새로운 화해를 모색하는 이념적 장치가 될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