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타고난 본성을 다해 천리(天理)에 이른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주역』 체계 안에서 해석되던 이 말은 송대 성리학이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학문의 방법론으로 채택하면서 새롭게 중요한 의의를 부여받게 되었다. 주희(朱熹)는 “‘궁리’는 진정한 앎에 이르기 위한 것이고 ‘진성’은 바른 실천을 목표로 하는데, 실천에는 앎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음의 기능은 신령스러워서(靈) 사물을 이해할 수 있고, 개개의 물(物)에는 이치(理)가 있으므로 이미 알고 있는 이치를 바탕으로 궁극까지 밀고 나가 미지의 원리를 깨쳐나가야 한다. 이와 같은 노력이 익으면 어느 순간 활연(豁然)히 툭 트이는(貫通)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 때 사물의 표리(表裏)·정조(精粗)가 남김없이 알려진다. 이것이 궁리의 과정이다.
그런데 사람은 타고난 기품(氣稟)에 제약되기도 하고, 또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욕구로 인해 진정한 본성(五常)을 충분히 구현하지 못하기 쉽다. 『중용』에도 “오직 천하의 ‘지성(至誠)’이라야 능히 그 성(性)을 다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후에야 ‘사람의 본성’을 모두 발현시킬 수 있고(盡人性), 이어서 사물과 사태의 올바름을 구현할 수 있어(盡物性),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와 그 창조과정에 동참할 수 있다. ‘진성’은 끊임없이 실천을 통하여 타고난 본성을 밝히려는 노력인 것이다.
궁리는 『대학』의 격물치지, 『중용』의 도문학(道問學)에 해당되고, 진성은 『논어』의 극기복례(克己復禮), 『중용』의 존덕성(尊德性)에 해당된다. ‘궁리’의 지적 과정은 ‘진성’의 구체적 실천과 병행해서 나아가야 한다.
이황(李滉)은 일찍이 “궁리와 진성, 즉 지(知)와 행(行)은 ‘수레의 두 바퀴’, ‘새의 두 날개’처럼 상보적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성리학파 내부에서도 ‘성이 곧 이(性卽理)’이니 궁리와 진성은 동일한 ‘지적 과정’이라는 해석이 있었다.
이와 반대되는 견해로 정약용(丁若鏞)은 궁리란 객관적 이치의 탐구라기보다 구체적 현실에서 부닥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존적 과정이며, 진성은 당연히 “마음의 기능이나 작용을 밝힌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징표인 ‘도덕적 지향’을 구현하는 주체성의 마당임을 논하였다. 이와 같은 시각은 성리학적 사유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인간관을 모색하고자 하는 정약용의 철학적 사유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