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송은 조선 후기 현종·숙종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간의 두 차례에 걸친 논쟁이다. 1659년에 기해예송이, 1674년에 갑인예송이 있었다. 17세기에 율곡학파로 대표되는 서인과 퇴계학파로 대표되는 남인이 예치가 행해지는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실현방법을 둘러싸고 전개한 성리학 이념논쟁으로, 조선 후기 정치형태였던 붕당정치를 대표하는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예에 관한 논쟁을 넘어서 왕위 계승의 정통성 문제와 연결되는 문제인데다 붕당이 결합되어 정치담당 세력이 일거에 교체되는 등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인조에게는 소현세자(昭顯世子) · 봉림대군(鳳林大君) ·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이 있었다. 소현세자에게도 석철(石鐵) · 석린(石麟) · 석견(石堅)의 세 아들이 있었으며, 봉림대군에게는 뒤에 현종이 되는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소현세자가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지 석달 만에 죽으니, 당연히 원손(元孫)인 소현세자의 첫째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위를 잇는 것이 종법에 따른 왕위계승방법이었다.
그러나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이 당시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화파(主和派)의 지지를 받으며 세자로 책봉되고,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姜嬪)이 시아버지인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죽었다. 또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어머니 강빈의 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가서 첫째 · 둘째아들이 죽고 막내아들만 살아남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효종이 즉위해 주화파를 몰아내고 10년 동안 송시열 등 척화파 사림의 지지를 받아 북벌을 준비하다 갑자기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효종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기간을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 기년(朞年)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고, 이 논쟁을 1차예송인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 한다. 조대비 복상은 우선 정태화가 ‘장자이든 차자이든 1년이라’는 『경국대전』에 있는 규정을 내세워 기년상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허목(許穆)과 윤선도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논쟁이 확산되었다. 주자의 『가례』에 따르면 부모가 장자에 대해서는 삼년상이고 차자 이하의 아들에게는 기년상이었다.
조대비는 효종의 어머니라서 신하가 될 수 없고 효종은 조대비에게는 둘째아들이므로 차자로서 기년상이 당연하고, 비록 왕위를 계승했으나 사종지설(四種之說: 왕위를 계승했어도 삼년상을 할 수 없는 경우) 중 체이부정(體而不正: 嫡子이면서 長子가 아닌 경우)에 해당되어 기년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등 서인의 주장이었다. 반면 효종이 비록 둘째아들이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자로 대우해 삼년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허목 등 남인의 주장이었다. 이들 남인과 연합한 소북계(小北系)의 윤휴(尹鑴)는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삼년상을 주장하였다.
이는 『가례』에 입각해 종법을 왕이든 사서인(士庶人)이든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는 수주자학파(守朱子學派)와 『주례』 · 『의례』 · 『예기』 등의 고례에 입각해 왕에게는 종법을 사서인과 똑같이 적용할 수 없다는 탈주자학파(脫朱子學派)간의 이념논쟁이었다. 또한, 이는 종법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소현세자의 아들이 왕위계승을 해야 하고, 효종은 원래 둘째아들로서 왕위계승의 자격이 없었는데 변칙적으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않는가의 차이이기도 하였다.
우연히 이 때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살아 있어 이러한 기년상의 주장은 왕위계승이 효종의 아들 현종이 아니라 적통(嫡統)인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으로 오해되기에 충분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오해의 소지를 기회로 윤선도는 이종비주(貳宗卑主: 宗統을 宗統과 嫡統으로 나누어 임금을 천하게 함.)을 내세워 기년상을 주장하는 송시열 등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송시열 등에 대한 흉악한 모함으로 다루어져 유배가게 되었다.
이후 예송은 표면적으로는 복제문제라는 단순한 전례문제로 논의되지만 내면적으로는 송시열 등의 서인세력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고 남인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려는 논쟁으로 비화되어 남인의 윤선도 구명운동과 더불어 지방유생의 대립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1차 예송은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죽고, 현종의 아들 이순(李焞)이 현종 8년 왕세자로 책봉되자 일단락되고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송시열과 허적(許積)의 정책대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674년(현종 15) 인선왕후(仁宣王后: 효종비)가 죽자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다시 예송으로 재현되었다. 『가례』에 따르면 효종비를 장자부(長子婦)로 보면 기년이요, 차자부로 보면 대공(大功: 9개월)이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큰며느리든 둘째며느리든 모두 기년이었다. 서인 쪽에서는 1차 예송 때처럼 차자부로 다루어 대공설을 주장하고 남인은 장자부로 다루어 기년상을 주장해 논쟁이 일어나는 것이 2차 예송인 갑인예송(甲寅禮訟)이다.
갑인예송에서는 서인인 현종비의 장인 김우명(金佑明)과 김우명의 조카 석주(錫胄)가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남인과 연결해 남인의 장자부 기년설을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의 복제는 기년상으로 정해지고 정권은 허적을 비롯한 남인에게 기울었다. 이 때 현종이 갑자기 죽고 숙종이 즉위해 송시열과 그를 옹호하는 서인세력을 제거하고 윤휴 · 허목 등의 남인에게 정권을 맡겼다. 그러자 이에 반대해 서인들이 송시열 구명운동을 벌이고 효종의 차자 기년설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송시열을 제거하고 정권을 주도하려던 김석주가 오히려 남인세력에게 밀려 위태롭게 되자 다시 서인세력과 연결해 허적 · 윤휴 등을 역모로 몰아 남인세력을 제거하는,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이 일어나면서 예송은 일단락되었다.
예송은 17세기에 율곡학파로 대표되는 서인과 퇴계학파로 대표되는 남인이 예치(禮治)가 행해지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실현방법을 둘러싸고 전개한 성리학 이념논쟁으로, 조선 후기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였던 붕당정치를 대표하는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그 동안 조선 후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중요한 사건으로 예송을 민생과는 아무 관계없는 1년상이나 3년상이니 하는 공리공담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예송은 조선 후기 왕위 계승을 비롯해 사회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중요한 이념논쟁이었다. 원칙적으로 누구든지 예(禮)는 같아야 한다는 천하동례파(서인)와 임금의 예는 일반 사람들의 그것과는 달리 변칙적으로 적용될 수도 있다는 왕자례부동사서파(남인)와의 이념논쟁의 결과로 나타난 정쟁이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성리학 이념과 직접 관련되는 호포법, 노비종모종량법, 궁방전 등의 정책대결을 수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