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613년(광해군 5) 폐모의 논의가 일어났을 때, 아버지가 국구인 김제남(金悌男)과 친교가 깊다 하여 화를 입었다. 자신도 폐모론의 정청(庭廳)에 불참하였다 하여 김류(金瑬) 등과 함께 10사(十邪)로 불리면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인조반정 뒤 1625년(인조 3) 회맹공신(會盟功臣) 책봉 때 구공신적장자(舊功臣嫡長子)로 가자(加資)되었으며, 혜민서제조(惠民署提調)에 서용되었다.
1638년 동지 겸 성절사(冬至兼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금양군(錦陽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어려서부터 문예에 능하였고, 특히 서도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서법은 중국의 오흥(吳興)을 따랐다.
지금까지 참판 박이서비(朴彝敍碑), 영흥부사 이수준갈(李壽俊碣) 등의 유필이 남아 있다. 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과 교유하였다. 조카 박세채(朴世采)가 행장을 짓고, 송시열(宋時烈)이 비명을 지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대동야승(大東野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송자대전(宋子大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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