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

  • 역사
  • 인물
  • 조선 전기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이칭금양군(錦陽君), 금양위(錦陽尉)
  • 분서(汾西)
  • 중연(仲淵)
인물/전통 인물
  • 관련 사건인조반정
  • 본관반남(潘南,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
  • 사망 연도1645년(인조 23)
  • 성별남성
  • 주요 관직혜민서제조
  • 출생 연도1592년(선조 25)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이문기 (경산대학,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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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연(仲淵), 호는 분서(汾西). 아버지는 참찬 박동량(朴東亮)이며, 장인이 선조이다.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3년(선조 36) 선조의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하여졌다. 1605년 친공신적장자(親功臣嫡長子)의 자격으로 2계(二階)를 초자(超資)받아 숭덕대부(崇德大夫)에 올랐으나,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폐모의 논의가 일어났을 때, 아버지가 국구인 김제남(金悌男)과 친교가 깊다 하여 화를 입었다. 자신도 폐모론의 정청(庭廳)에 불참하였다 하여 김류(金瑬) 등과 함께 10사(十邪)로 불리면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인조반정 뒤 1625년(인조 3) 회맹공신(會盟功臣) 책봉 때 구공신적장자(舊功臣嫡長子)로 가자(加資)되었으며, 혜민서제조(惠民署提調)에 서용되었다.

1638년 동지 겸 성절사(冬至兼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금양군(錦陽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어려서부터 문예에 능하였고, 특히 서도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서법은 중국의 오흥(吳興)을 따랐다.

지금까지 참판 박이서비(朴彝敍碑), 영흥부사 이수준갈(李壽俊碣) 등의 유필이 남아 있다. 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과 교유하였다. 조카 박세채(朴世采)가 행장을 짓고, 송시열(宋時烈)이 비명을 지었다.

참고문헌

  •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 『선조실록(宣祖實錄)』

  •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 『대동야승(大東野乘)』

  •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 『송자대전(宋子大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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