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일(聖一), 호는 매하(梅下)이다. 필명으로 매하산인(梅下山人)·매하산인(賣下山人)·매하생(梅下生)을 사용하였으며, 신소설 『추월색(秋月色)』의 작가인 최찬식(崔瓚植)이 아들이다.
1859년 2월 6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한시에 조예가 깊다. 1896년부터 1898년까지 독립협회 운동에 동참하면서 1897년 고향인 경기도 광주에 사립 시흥학교(時興學校)를 설립해서 신교육보급에 앞장섰다. 1904년 일진회(一進會)에 가입하였고 1905년 6월 무렵 『대한일보』 기자로 활동하였다. 1906년 4월 외국어학교 교관, 9월 한성 한어(漢語)학교 교관을 역임하였다.
1907년 9월 19일 일진회 총무원으로 선임된 후 의병운동을 매도하고 일본과 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의 각종 선언서와 서류 작성에 관여하였다. 1907년 9월 19일 이완용 내각을 옹호하고 의병을 살육해야 한다면서 진압을 종용하는 「거의선언서(擧義宣言書)」 작성과 배포에 참여하였다. 10월 12일 일본의 ‘보호정치’를 적극 찬성하면서 의병운동을 어리석다고 주장하는 「경고지방폭도문(警告地方暴徒文)」을 작성·배포하였다. 이를 통해 일진회원 중에 능문가(能文家)로 통하였다. 1908년 3월 일진회와 연계된 노동야학회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나 4월에 사임하였다.
1909년 2월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보』 주필이 되었고, 7월 『국민신보』 제4대 사장이 되었으며, 10월 일진회 대표로 삼파연합정견협정위원(三波聯合政見協定委員)이 되었다. 같은 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장례식 조문대표단의 조문제술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1월에는 이등박문의 죽음을 기리는 국민대추도회 준비위원에 선임되었다. 또 같은 달인 11월 중순 한자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이등박문 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석하였다. 1909년 12월 2일 일진회의 「합방상주문」과 「합방건의서」 작성에 참여하고 합병을 찬성하는 의견서를 통감부에 제출하는 등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통치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협력하였다.
1910년 들어서 국민찬성동지회, 국민협성회, 유생건의소 등 ‘합방’을 청원하는 각종 단체에서 통감부로 보내는 글을 모두 작성하였으며 이 일로 경무총감부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합병되기 전부터 자신의 아들 최영식에게 일본 이름을 지어주어 『대한매일신보』에서 “흉적(凶賊)”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1910년 1월 친일보부상단체인 대한상무조합소 고문으로 위촉되었고, 2월 일진회에서 국민생활방침에 대한 ‘연구회’를 조직할 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6월 대한상무조합 부장을 맡았다.
일제강점 이후 인천에서 발행된 일본어 일간지 『조선신문』의 「조선문(朝鮮文)」의 주필을 맡아 1916년 4월 「조선문」이 폐간될 때까지 재직하였다. 1912년 1월 일본인 고위관료와 조선인 친일관료·조선귀족이 주도하여 조직한 친일유교단체 이문회(以文會)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8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이문회를 계승한 조선문예사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17년 4월 『조선문예』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았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 문예란을 담당하였으며 ,『신문계(新文界)』와 그 뒤를 잇는 『반도시론』의 필진으로도 활동하였다. 기고문 중에는 1914년 메이지[明治]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일제강점 이후 1910년대 식민통치 시기를 ‘태평성대’ 혹은 ‘요순시대’에 비유하였다.
1920년 1월 친일유림단체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해서 발회식에서 발기취지서를 낭독하였다. 대동사문회에서 이사, 편찬부 주임, 상무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기관지인 『대동사문회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설화집 『실사총담(實事叢譚)』(1918)과 악부시집 『해동죽지(海東竹枝)』(1925)를 남겼다. 1935년 8월 29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