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정견(廷堅), 호는 백졸암(百拙庵). 할아버지는 유복기(柳復起)이며, 아버지는 유우잠(柳友潛)이다.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서사(書史)를 탐독하여 『중용』과 『대학』의 연구에 힘썼다.
1635년 황해도의 유생들이 그 시론(時論)을 타서 이이(李珥)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주장하였는데, 조정의 관리들은 성혼(成渾)까지 문묘에 종사시켜야 한다고 소(疏)를 지어 올렸다. 그러나 인조는 그들의 도덕이 높지 못하다고 승낙하지 않았다.
1650년(효종 1) 다시 성균관에서 그 주장을 들고 나와, 중외(中外)가 호응하여 사론(士論)이 통일되었다고 주달(奏達)하였다. 이때에 영남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일어나자, 소수(疏首)로 유생 800여명과 함께 서울에 올라와서 상소하였다.
이에 성균관에서는 유직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고 부황(付黃)의 벌까지 내렸다. 이때부터 문을 닫고 세상 일에 뜻을 버리고 집에 ‘백졸암(百拙庵)’이라는 편액(扁額)을 걸었다.
그 뒤 성균관에서 부황을 해제할 것을 상소하여 벌을 모두 해제받았으나,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문인들과 더불어 도학(道學)을 강론하였으며, 원근의 선비들과 인읍(隣邑)의 수령들이 찾아와서 가르침을 청하고 공경하였다. 저서에 『백졸암문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