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경중(慶仲), 호는 졸헌(拙軒). 박임종(朴林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조년(朴兆年)이고, 아버지는 사간 박소(朴紹)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홍사부(洪士俯)의 딸이다. 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7세부터 유조순(柳祖詢)·성제원(成悌元)·이중호(李仲虎) 등에게서 배웠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 1564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춘추관봉교(春秋館奉敎)·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감찰·예조좌랑·병조좌랑,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헌납(獻納)·장령(掌令), 사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사성(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동서분당으로 당쟁이 일기 시작하자 한 때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힐 생각도 하였다. 그러나 1577년(선조 10) 다시 관계에 나와 집의·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공조참의·호조참의를 거쳤다. 병조참의로 있을 때 당시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배척하는 상소는 받아들여지고 지지하는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보고 사직하였다.
1589년 병조참판에 제수되었고, 이후 대사헌,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참판 겸 부총관으로서 왕을 호종했고, 의주(義州) 행재소(行在所)에서 대사간·공조참판을 지냈다. 1593년 왕을 호종해 환도하던 중 해주에 이르러 병이 나 남아 있다가, 1595년 왕비를 호종해 환도한 뒤 형조참판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왕비를 호종하고 수안(遂安)까지 가서 이듬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묘지는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