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선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전기 서운관장루, 부정 등을 역임한 학자. 풍수지리학자.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주요 관직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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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조선전기 서운관장루, 부정 등을 역임한 학자. 풍수지리학자.
생애 및 활동사항

1413년(태종 13)경 풍수학(風水學)에 입학해, 풍수학을 공부하고 잡과(雜科)를 통해 출사하였다. 1430년(세종 12)경 서운관장루(書雲館掌漏)에 임명되었다.

1433년경 삼군부행사정(三軍府行司正)에 임명되었으나 곧 서운관직으로 옮기고, 이후 판관(判官)·첨정(僉正) 등을 거쳐 부정(副正)에 승직하였다. 그러다가 1444년 그간에 올린 음양화복(陰陽禍福)에 대한 글이 논란되자 서산(瑞山)으로 퇴거하였다. 1460년(세조 5) 전서운관부정으로서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된 뒤 졸하였다.

1413년 풍수학 재학 중 “풍수지리로 볼 때 도성의 장의동문(藏義洞門)과 관광방(觀光坊) 동쪽 언덕에 있는 길[東嶺路]은 경복궁의 좌우 팔입니다. 청컨대 길을 막아 지맥을 완전하게 하소서.”라면서 음양화복설을 상서하였다.

이후 사관과 함께 세종대를 통해 10여 차례에 걸쳐 경복궁과 창덕궁, 이궁(離宮, 별궁) 조성, 헌릉(獻陵)과 수릉(壽陵), 원묘(原廟) 등과 관련된 음양화복설을 개진하였다. 세조대에도 1464년에 다시 경복궁 지맥완호사(地脈完護事)를 상서하였다. 이러한 그의 상서는 1413년의 경복궁지맥완호사만 반영되었을 뿐이었다.

그 외에는 1441년에 그에게 음양화복과 관련된 상서를 금지하면서 “음양지리설을 상서해 망령되이 화복설을 주장하고, 혹은 국가논의에 참여해 죄에 저촉됨이 적지 않았다.”고 했듯이 상하의 물의를 야기시켜면서 채택되지 못하였다.

또 백관들이 위의 상서와 관련해 여러 번 죄를 청하는 요구가 있었지만 세종의 옹호로 무사하였다. 풍수지리에 조예가 있었으나, 조관(朝官)과 선배 및 동료 풍수사와 의견이 많이 달랐기 때문에 이들의 배척으로 별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다.

참고문헌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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