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慵齋) · 부휴자(浮休子) · 허백당(虛白堂) · 국오(菊塢)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염조(成念祖)이다.
성현은 1462년(세조 8) 23세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466년 27세로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로 등용되었다. 홍문관 정자를 역임하고 대교(待敎) 등을 거쳐 사록(司錄)에 올랐다. 1468년(예종 즉위년) 29세로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그리고 예문관 수찬 · 승문원 교검을 겸임하였다. 그는 형 성임(成任)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다. 그는 가는 길에 지은 기행시를 엮어 『관광록(觀光錄)』이라 하였다.
성현은 1474년(성종 5)에 지평을 거쳐서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었다. 이듬해에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재차 북경에 다녀왔다. 147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제학 · 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간 · 대사성 · 동부승지 · 형조 참판 ·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현은 1488년에 평안도 관찰사로 있었다. 조서를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의 접대연에서 시를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그들을 탄복하게 하였다. 이 해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에 대사헌이 되었다.
성현은 1493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그러나 성현은 음률에 정통하여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를 겸했기 때문에 외직으로 나감으로써 불편이 많았다. 그래서 한 달만에 예조 판서로 제수되었다. 이 해에 유자광(柳子光) 등과 당시의 음악을 집대성하여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였다.
성현은 성종의 명으로 고려 가사 중에서 「쌍화점」(雙花店) · 「이상곡」(履霜曲) · 「북전(北殿)」 등의 표현이 노골적인 음사(淫辭)로 되었다고 하여 고쳐 썼다. 한편으로는 관상감 · 사역원 · 전의감(殿醫監) · 혜민서(惠民署) 등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곳에 딸린 관원들을 종전대로 문무관의 대우를 받도록 하였다.
성현은 연산군이 즉위한 후에 한성부 판윤을 거쳐서 공조 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504년에 『용재총화(慵齋叢話)』를 저술하였다.
문학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한 인물이다. 황필(黃㻶)이 지은 「용재총화발(慵齋叢話跋)」에는 “ 『허백당집』 30권, 『진의패설(秦議稗說)』 12권, 『상유비람(桑楡備覽)』 40권이 있으며, 『경륜대궤(經綸大軌)』 50권은 아직 탈고에 이르지 못했고, 또 『풍소궤범(風騷軌範)』, 『악학궤범』, 『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은 모두 그가 찬술한 바이며, 『용재총화』는 그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현전하는 그의 작품들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풍소궤범』과 『악학궤범』이다.
『악학궤범』은 성현이 문인 학자로서 국가의 규범이 될 음악 전적의 정비를 위해 편찬을 담당한 결과물이지만, 이는 그가 음악에 깊은 조예를 갖춰 그 사업을 담당할 역량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풍소궤범』은 성현이 속한, 관료이자 문인 학자였던 사대부들에게 있어 자신들의 존재와 직접적 관련을 갖는 시문(詩文)을 정리한 작업이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한(漢) · 위(魏)에서 명(明) 초기에 이르는 중국 역대의 고시(古詩)들을 집대성하여 분류한 것이다.
성현의 시편은 일반 백성, 즉 하층민에 대한 관심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애민시(愛民詩)의 전통을 이루고 있다. 「맹호행(猛虎行)」, 「향곡즉사(鄕曲卽事)」, 「궁촌사(窮村詞)」, 「예맥행(刈麥行)」, 「잠부탄(蠶婦歎)」, 「과갈화리(過曷和里)」 등은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성현의 시편 가운데 또 눈에 띄는 것으로는 국가적 행사나 민간의 풍속을 기록한 작품들이다. 「관괴뢰잡희(觀傀儡雜戱)」, 「관나(觀儺)」, 「처용(處容)」, 「관화(觀火)」, 「제석(除夕)」, 「향반(香飯)」 등이 그것이다.
『용재총화』는 필기(筆記)라는 문학 양식으로 조선 전기 사대부 사회의 성립과 함께 자신들의 계급적, 문화적 연대에서 사대부의 일화(逸話)와 시화(詩話), 소화(笑話) 등을 기록한 것이다.
성현의 문학적 입장은 그의 「문변(文變)」이라는 글에서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