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관각인 홍문관(弘文館) · 예문관(藝文館)에서 임금의 말이나 외교 업무에서 사용하는 말을 옮겨 적을 때 사용하는 한문 문장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관각문(館閣文)’ 또는 '관각문자(館閣文字)'라 하였는데, 이때의 ‘문자’ 역시 문자로 이루어지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므로 그 개념은 ‘문장’에 가깝다. 그리고 관각에서 이루어지는 문자 행위뿐만 아니라 관각풍을 띠고 있는 문학 작품을 포괄한다. 이때의 '문학'이라는 말은 문(文)과 학(學)의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문학’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관각문자는 시보다는 문에 역점이 주어진 것이다. 관각에서 애용하는 문체를 특히 '관각체'라 부르기도 한다. 서거정(徐居正)은 일찍이 문장의 성격을 구별하여 대각(臺閣)의 문장, 선도(禪道)의 문장, 초야(草野)의 문장 등으로 구분한 바 있다. 이 가운데 '대각의 문장'은 곧 관료층의 문장을 말하는 것이므로 관각의 문장과 대각의 문장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관료층에서 향유하는 문장은 관각문자 외에도 일반 행문(行文), 즉 서(序) · 발(跋) · 기(記) · 서(書) 등이 중요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고려 초기에 과거 제도가 실시된 이래로 선비 정치의 전통이 수립되었다. 문장을 익히는 일이 문사(文士)의 필수 교양이었으며 문장은 곧 출세의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홍문관 · 예문관에 임명되어 문한(文翰)의 임무를 담당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흔히 '문형(文衡)'으로 불리는 대제학(大提學)의 직임은 문신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로 추앙되었다.
대표 인물로 조선 전기에는 권근(權近) · 변계량(卞季良) · 서거정, 관곽삼걸인 정사룡(鄭士龍) · 노수신(盧守愼) · 황정욱(黃廷彧)이 있었다. 조선 중기에는 한문 4대가(四大家), 곧 상촌(象村) 신흠(申欽) ·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 계곡(谿谷) 장유(張維) ·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있었다.
관각문학은 당(唐) · 송(宋)의 고문(古文)을 존중하는 정통 문학(正統文學)으로, 전아(典雅)한 수사(修辭)와 유창한 서술이 특징이다. 문체와 내용이 다양하고, 풍격이 전아장중(典雅莊重)하며, 대우와 변려체를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관각문학은 정치적 효용을 중시한다는 특징도 있는데, 관각문학으로서 문명 정치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그 효용을 찾을 수 있다.
관각체는 장중하고 통창(通暢)한 것이 특징이므로, 대체로 장식미에 치중하는 변려문(騈儷文)이 주로 쓰였다. 그 밖의 행문은 간결미와 암시성을 중시하는 고문(古文)이 주류를 이루면서 조선 후기까지도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