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도덕적 · 교육적 목적의 성취를 위한 한 방법으로 보는 효용론적 견해이다. ‘문이재도론(文以載道論)’이라고도 한다.
‘문이재도’는 ‘문장으로써 성현(聖賢)의 도(道)를 밝힌다.’ · ‘글로써 사상을 표현한다.’ · ‘문장으로 도를 싣는다.’라는 뜻으로, 문과 도의 관계에서 도를 더 강조하는 문학관이다.
효용론의 문학관에 가까우며, 문학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문이관도(文以貫道)와 대비된다.
남북조 시대에 양(梁)나라의 유협은 “도는 성인(聖人)으로 인하여 문으로 나타나고 성인은 문으로 인하여 도를 밝힌다[道沿聖以垂文 聖因文以明道].”라고 하는 ‘문이명도(文以明道)’를 주장하였다.
당(唐)나라 고문파(古文派)는 “문은 도를 꿰는 기구이다[文者貫道之器也].”라고 하는 ‘문이관도’를 주장하였다.
송(宋)나라 이학파(理學派)는 “문은 도를 싣는 것이다[文所以載道也].”라고 하는 ‘문이재도’를 주장하였다.
문이재도론은 고문 운동(古文運動)과 관계가 깊다.
당송 대에 걸쳐 진행된 고문 운동은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이 유가(儒家)의 도를 선양(宣揚)하고자 한 것으로, 문체의 방면에서 육조(六朝) 이래로 널리 퍼진 변려문(騈儷文)의 폐해를 극복하려는 방법이기도 했다.
한유는 도통론을 주장하여 맹자(孟子)에서 끊어진 도통(道統)을 이어 도교 · 불교의 폐해를 막아야 한다며, 도일원론적(道一元論的)인 견해를 피력했다. 유종원은 이보다는 유연하게 도와 문장 모두 중요하다는 견해를 밝혔으나 그 중심은 도에 있었다.
북송(北宋)의 도학자(道學者)인 주돈이(周敦頤) 역시 ‘문이재도’를 주장하여, 문학의 사회적 효용을 순문학(純文學)의 가치보다 우선시했다.
문이명도 · 문이관도의 주장도 문학의 사회적 효용에 주안점(主眼點)을 둔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입장이 같다.
북송 도학가의 재도관이 도학(道學)을 우위에 두고 문학을 경시(輕視)하려 한 것은 아니다.
주돈이의 『통서(通書)』 · 『문사(文辭)』는 그러한 재도관의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다. “문학이란 도를 싣는 것이다. 수레를 치장만 하고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수식은 헛된 것이다. 빈 수레야 더 말할 것이 없다. 문사는 기술이요, 도덕은 실체이다. 그 실체에 도탑고 글 쓰는 데에 훈련된 사람이 도에 관하여 적어 내려갈 때, 아름다우면 사랑받게 되고, 사랑받으면 전해지게 된다. 어진 이가 그것을 배워 지극함에 이르게 되면, 이것이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말이 문체가 없으면 멀리 행해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文所以載道也 輪轅飾而人弗用 徒飾也 況虛車乎 文辭 藝也 道德 實也 篤其實而藝者書之 美則愛 愛則傳焉 賢者得以學而致之 是爲敎 故曰言之無文 行之不遠].”
주돈이는 공자(孔子)의 말로 인용되어 있는 『좌전(左傳)』에서 “말이 문체가 없으면 멀리 행해지지(전해지지) 못한다[言之無文 行而不遠].”라는 말을 끌어, 문사(文辭)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문사가 한낱 수식에 그치는 것을 경계하였다. 도학가의 재도관은 ‘도’의 내용을 유교적 덕목(德目)으로 제한하고, 문학 활동에 앞서 몸과 마음을 올바르게 수양하는 것[修身]을 전제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을 도학에 종속시키기 쉽다. 그리하여 정이천(程伊川)은 글을 꾸며 지으면 도를 해친다는 ‘작문해도(作文害道)’라는 설을 내놓기도 하였다.
재도관은 관도론(貫道論)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주희(朱熹)가 이한(李漢)의 ‘관도지기설(貫道之器說)’이 본말(本末)을 뒤집었다고 비판한 것에 근거하여, 재도론과 관도론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주희의 경우 문장을 주체로 삼는 논법을 경계한 것이다.
그런데 이후에는 관도론이 도를 경시하는 논리이고 재도론이 문장을 경시하는 논리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재도론이나 관도론은 모두 성현의 문장이나 사상을 모범으로 삼으려 한 점이 같다. 그러나 성현의 문장을 모범으로 삼았던 송나라 대에는 재도론이 우세하였다고 할 수 있다.
관도론은 문장을 통하여 도가 드러난다는 관점이고, 재도론은 도를 위해서 문장을 쓴다는 관점이다. 관도론에서의 ‘도’는 유교적 이념보다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덕목을 가리키는 일이 많다. 한편, 재도론의 ‘도’는 유교적 덕목으로 제한된다. 그래서 불교의 시와 산문에 대해서 ‘관도지문(貫道之文)’이라고 평가하긴 하지만, ‘재도지문(載道之文)’이라고 평가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유가의 문장에 대해서는 ‘관도’와 ‘재도’의 명칭이 혼용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문장과 도의 관계를 밝히는 유가의 문학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구체적인 논리로 발전하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최자(崔滋)는 「보한집서(補閑集序)」에서 “글이란 도를 밟아 가는 문이라 하면서 상도에 맞지 않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글이 도를 나타내기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문장을 지을 때, 사리에 맞는 말을 쓰는 것이 도를 나타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성리학의 발달과 함께 ‘문이재도’의 문학관은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정도전(鄭道傳)도 ‘재도지기(載道之器)’라는 말을 사용하여, 문이란 도를 싣는 그릇이라고 하면서, “인문(人文)이 그 도를 얻으면 시서예악(詩書禮樂)의 가르침이 천하에 밝혀진다.”라고 하였다. 서거정(徐居正)도 「동문선서(東文選序)」에서 “문사재도지기(文辭載道之器)”라고 하여, 문장이 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의 문학관을 피력하였다. 김종직(金宗直)도 “경술(經術)이 곧 문장의 근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도 경전의 내용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는 데서 참된 문장을 이룰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김시습(金時習)도 “문장이 도에 비해서 높은 것일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론 및 주장들은 문장을 통해서 얼마든지 도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이(李珥)는 「성학집요서(聖學輯要序)」에서 “도는 오묘해서 형상이 없기 때문에 문으로써 도를 형상화하는 것이다.[道妙無形 文以形道]”라고 하여, 문장을 ‘문이형도(文以形道)’라고 표현하였다.
이처럼 재도관이 확립된 이후, 조선 후기 한문학은 경세파 문학과 실학파 문학(實學派文學)이 주요한 맥을 이루면서, 경세(經世)의 문학을 주류로 삼게 되었다. 이 문학관은 조선조의 한문학뿐만 아니라 시조(時調) · 가사(歌辭)와 같은 국문문학(國文文學) 갈래의 창작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