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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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십가문초
여한십가문초
한문학
개념
한문으로 쓰여진 산문체의 문장.
내용 요약

고문은 한문으로 쓰인 산문체의 문장이다. 당나라 때 유행하던 수식이 많은 변체문(騈體文)과 다른 산문 체제가 출현하였다. 당나라 한유는 변려문을 비판하고, 고대 문학 정신을 계승한 선진고문을 문장의 모범으로 삼았다. 고문 운동가들은 고대 문학 전통을 계승하여 새로운 문학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였다. 우리나라는 당나라에 유학했던 최치원의 영향으로 고려 초기까지 변려문이 주로 쓰였다. 조선 중기 최립은 의고문파의 이론을 흡수하여 진한고문을 본받고자 하였다. 허균, 박지원 등은 고문의 가치는 자기 시대의 문체를 만드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목차
정의
한문으로 쓰여진 산문체의 문장.
내용

국문학주1이나 국어학에서는 중세국어로 표기된 글을 현대문과 대칭해서 부르고 있다. 또, 중국에서는 일상어인 ‘백화(白話)’와 대립하여 문언(文言)으로 쓰인 산체문(散體文)을 ‘고문’이라 병칭하기도 한다. 근대 이전의 한문학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 ‘고문’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첫 번째는 문자인 고대자체(古代字體)로서의 고문이다. 중국 선진(先秦)시대의 주2이나 전서(篆書)같은 문자를 통칭하는 경우이다. 우리나라에서 허목(許穆)이 편찬한 『고문운율(古文韻律)』의 내용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자체(字體)로서의 개념이 고문이 가지고 있던 본래적인 뜻이다.

두 번째는 고대 주3이나 학파로서의 고문이다. 한나라 사람들이 주4의 전적을 주5의 옛 집에서 발견하여 ‘벽중서(壁中書)’라 불렀던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후대에 경학연구자들 사이에서 금고문논쟁(今古文論爭)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고문의 개념이 학파를 지칭하는 말이 되기도 하였다.

세 번째는 문체개념으로서의 고문이다. 중국 주6 이전에는 문체적인 뜻으로 고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당나라 때에 와서 당시 유행하던 조작적이고 수식이 많은 사륙변려의 주7과 다른 산문 체제를 독립적으로 유지한 문체가 출현하였다.

이것을 한문학에서는 보편적으로 이와 같은 성격을 지닌 문체를 고문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석주(金錫胄)가 편집한 『고문백선(古文百選)』의 내용들이 문체적 개념으로서의 고문을 수용하여 구성되고 있다. 문체적 개념으로서의 고문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주8를 중심으로 한 당나라 고문운동가들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다. 문학 역사상의 새로운 산물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고문은 낱말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복고적인 면모 내지 사조에 영향을 받아 나타났다는 점이다. ‘선진고문(先秦古文)’을 전범으로 생각한 고문운동가들의 처지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세 번째는 고문운동가들이 실천한 고문은 우수한 고대의 문학전통과 정신을 성공적으로 계승하면서 전혀 새로운 문학세계를 창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나라의 고문운동가들이 가졌던 문학에 대한 새로운 자각에 이은 참신한 문학관의 형성에서 비롯되었다.

고문은 문학사의 발전에 따라 그 시대의 요구에 적합한 문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복고 한 방면에만 치중한 고문가들도 있었다. 주9에 와서는 하나의 풍조를 이루기도 하였다. 문장은 반드시 진한의 것을 표방해야 한다는 의고문가(擬古文家)가 그것이다. 그 원인은 주11의 문체가 점차로 평이하고 위약(萎弱)한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여 형식에 치우친 주12주13이 풍미하게 된 것에 있었다. 이것에 반동하여 새로운 문체혁신운동으로서 의고문파가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명나라의 한편에서는 당송고문을 존숭하는 왕신중(王愼中) · 당순지(唐順之) · 귀유광(歸有光)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당송을 배우는 데에 그치고 창신(創新)의 경지에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주14에 와서 당송고문파가 문단에서 큰 세력을 떨쳤다. 중반에는 절충파로서 주15가 중심이 된 주16가 출현하였다.

방포는 ‘고문의법(古文義法: 고문을 본받는다.)’과 ‘문도합일(文道合一: 글과 도를 하나로 합한다.)’을 내세워 주17의 의리와 주18의 문장 및 진한의 성조(聲調)와 의 규구(規矩: 법도)를 융합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고문관은 주19 · 주20 등의 명청팔대가(明淸八大家)에게 이어져 청나라 말기까지 계승되었다.

이상 문체개념으로서 고문의 변모양상을 살펴보았다. 결국 진한의 고문과 당송의 고문이 당나라 시대의 고문운동 이후 서로 대립, 갈등하면서, 각 시대 풍기(風氣)에 따라 특징을 달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문이 수입된 이래로 줄곧 『문선(文選)』의 영향을 받아 고려 초기까지 변체문이 주로 쓰였다. 한국한문학의 비조(시조)로 불리는 최치원(崔致遠)이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산문체의 고문을 사용하여 성공적인 문학 활동을 한 이로는 고려 중엽의 김부식(金富軾)을 꼽는다.

그의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된 많은 작품들은 고문체의 문학성이 풍부한 문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송고문이 실제로 우리나라에 처음 제창된 것은 고려 말엽의 이제현(李齊賢)부터였다. 그의 고문관은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과문(科文)의 폐단을 지적한 점 등으로 보면 확고한 고문관이 정립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가 한유와 같은 고문운동을 전개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적어도 운동은 계기적으로 상당한 인원에 의하여 뚜렷한 양상을 보일 때에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그렇다면 이제현의 경우는 하나의 고문가로서 뒷날의 고문가들에게 모범이 된 인물로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고려 말기에 오면 성리학이 도입됨에 따라 고문론자들이 꺼리는 주21 · 주소체(註疏體)의 문장이 보급되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체가 대개 이러한 면모를 닮게 되었다. 이수광(李睟光)이 “ 김종직(金宗直)은 동방의 거벽(巨擘)이었지만 속하문자(俗下文字)를 많이 썼다. 그러나 그 밖에 다른 문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고 지적한 것에서도 그와 같은 현실을 실감할 수 있다.

조선 중기에 최립(崔岦)은 이러한 문풍을 타파하기 위하여, 명나라의 의고문파의 고문이론을 흡수하여 진한고문을 본받고자 하였다. 윤근수(尹根壽) · 신유한(申維翰) 등도 약간 다르지만 이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상당한 세력으로 문단을 지배하였다.

허균(許筠)은 의고문을 반대하는 고문이론을 주장하여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고문론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문설(文說)」에서 문답형식을 동원하여 고문을 회복하기 위하여, 옛 명문을 표절하고 주28하는 것은 진정한 고문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또한, 당송고문의 진정한 가치는 복고에 있지 않고, 바로 자기 시대의 문체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고 파악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대의 상용어를 그대로가 아닌, 갈고 다듬어 창조하여 사용하는 것이 참다운 고문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허균의 뒤로 장유(張維) · 이식(李植) · 김창협(金昌協) 등이 계속 나타났다. 그들은 종래의 주29, 주30, 주31하던 누습에서 탈피하였다. 그리고 다양하고 참신한 문장을 구사하여 후세 고문가들의 전범(본보기가 될 만한 모범)이 되었다. 이들의 고문관은 의고문을 배격하고, 한결같이 개성 있는 고문론을 강조한 것에서 처지를 같이하고 있다. 장유는 진부한 말을 버리고 창조된 언어로 작문할 것을 강조하였다. 형식보다는 내실을 기할 것과 문장의 화려함보다는 주22한 글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김창협은 『잡지(雜識)』에서 당나라의 한유가 주23을 버릴 것을 강조한 것은 세속의 용상어(庸常語)만이 아니라 주24에 보이는 글이라 해도 옛 사람들이 일단 말하였던 것은 모두 진언으로서 버려야 할 것이라 하였다. 그는 자신의 고문관에서 보다 강도 있는 개성추구정신을 나타내었다.

이식은 「작문모범(作文模範)」에서 현실적인 문체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시대마다 풍속과 사정이 현격히 차이가 있기에 그 시대에 맞는 고문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의고문파를 배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문가들의 고문관을 계승하면서 보다 혁신적인 내용과 표현을 통한 문학세계를 창조한 이는 박지원(朴趾源)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역사 흐름에 부응하여 새로운 문체를 창출하여 당시 정조의 ‘문체반정’의 대상인물의 하나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그의 고문이론은 한마디로 ‘법고이창신(法古而創新 : 옛 것을 기준으로 새것을 만든다.)’이라 하겠다. 이는 그의 투철한 역사의식의 소산이다.

그는 복고를 주장하는 의고문파들의 퇴영적 역사의식을 극복하였다. 그리고 발전적으로 전통을 계승하여 새로운 문체를 창조하고자 하는 최초의 고문운동가들의 정신을 당대의 현실에서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박지원은 「초정집서(楚亭集序)」에서 고정 불변하는 예(禮)나 악(樂)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현실에 맞는 문체를 쓰게 되면 오늘날의 글(今文 금문)이 곧 고전적인 가치를 획득한 글(古文 고문)이 될 수 있음을 논증하였다. 결국, 세월의 흐름과 풍속의 변천 속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현실과 자신의 문제를 진실하게 다루면 자연히 금문이 곧 고문이 된다는 논리이다. 이 논리는 금문을 통한 고문이론의 설법이다. 매우 독창적이고도 현실성이 강한 점이 특징이다. 그는 실제로 『열하일기』를 통하여 그의 이와 같은 고문관을 구현하고 있다.

홍석주(洪奭周)는 전통적인 주자학을 옹호하면서 청나라의 고증학을 비판하였던 인물이다. 「답이심부서(答李審夫書)」에서 진한고문을 추앙하는 의고문가들을 공격하여 모방을 거부하였다는 점에서 앞서의 고문가들과 맥이 통한다. 그는 도학가적인 취향이 있으면서도 문의 중요성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많은 논문들이 고문과 관련하여 쓰이고 있다.

김매순(金邁淳)은 선대인 창협의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홍석주와 같이 주25의 문학론을 강조하였다. 그는 「답사심서(答士心書)」에서 복고를 함은 형세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현재적인 소재를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당송고문을 통하여 문장의 묘리를 터득하고 나아가 진한고문의 진수를 체득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근대의 이건창(李建昌)김택영(金澤榮) 또한 모방과 표절을 배격하고 개성 있는 문장을 강조한 사람들이다. 이건창은 글이란 결국 자신의 마음에 맞게 지을 뿐이라 하였다. 글은 마음에 흡족하면 그만이지 천하후세를 염두에 둘 것이 없다. 더구나 당대의 기림을 바랄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상당히 독자성이 강하고 주체적인 관점에 선 문학관이다. 그러므로 이전의 것들과는 차이점이 발견된다. 그는 이와 같은 그의 문학관을 실천하기 위하여, 말을 어떻게 놓을 것인가 하는 조사(措辭)에 신중을 기하였다.

김택영은 신기(神氣)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글이란 엄정한 구조가 중요하기는 하나 일정한 법칙만을 고수해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글에는 변(變)의 묘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 이유는 변하지 않는 중에서도 크게 변해야만 그 법이 생명력을 갖게 되고 문장이 묘한 경지에 이르러 신기가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근대에 편집된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抄)』는 앞서의 문인들의 고문선(古文選)으로 한국 고문연구의 지침서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을 통하여 본 한국 고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문이란 스스로 일가를 이룬 글이다. 둘째, 시대 현실에 적합한 글로서 그 시대의 진실된 감정을 담고 있는 글이다. 셋째, 진부한 어구나 표현을 쓰지 않고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도(道)를 싣고 있으면서도 유기적으로 쓴 글을 고문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면, 이는 보편적 산문체로서의 고문일반이 가지는 통시적 · 포괄적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한문학에서 고문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일정 정도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결된 상태는 아니다. 고문에 대한 심도 있는 개념 정립, 고문가들의 작품 분석, 문학 현상의 출현 배경과 과정을 탐색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각 시대별로 독서계층이 즐겨 읽었던 고전작품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어떠한 방면으로 고문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해서도 폭넓게 연구해야 한다. 아울러 고문 연구가 옛말의 연구에만 그쳐서는 연구의 의의가 반감될 것이다. 오히려 현재의 문체론 내지는 작문론에까지 그 이론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도록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진정한 고문 연구가 곧 금문 연구임을 잊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연구방향은 자명하다 하겠다.

참고문헌

『중국문학비평사』(곽소우(郭紹虞), 문사철출판사(文史哲出版社), 1982)
『한국문학사상사시론』(조동일, 지식산업사, 1978)
『연암소설연구』(이가원, 을유문화사, 1965)
『한국한문학사』(이가원, 민중서관, 1961)
『중국문학사』(호문익(胡雲翼), 장기권(張基槿) 역,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61)
「고문의 원류와 성격」(김도련, 『한국학논총』 2, 국민대학교한국학연구소, 1979)
「영재 이건창과 창강 김택영의 고문관」(김도련, 『한국학논총』 3, 국민대학교한국학연구소, 1980)
「고문의 성격과 전개양상」(김도련, 『한국문학연구입문』, 지식산업사, 1982)
「고문의 문체연구」(김도련, 한국학논총 6, 『국민대학교한국학연구소』, 1984)
주석
주1

그 나라 고유의 문학. 또는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 우리말샘

주2

고대 중국에서 쓰였던 한자 서체의 하나. 필묵이 쓰이기 전에 쪼갠 대나무 같은 것으로 옻을 묻혀 썼다. 글자 모양이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늘어서 올챙이를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말샘

주3

일정한 목적, 내용, 체재에 맞추어 사상, 감정, 지식 따위를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여 적거나 인쇄하여 묶어 놓은 것. 우리말샘

주4

공자의 학설과 학풍 따위를 신봉하고 연구하는 학자나 학파. 우리말샘

주5

중국 춘추 시대의 사상가ㆍ학자(B.C.551~B.C.479).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노나라 사람으로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인(仁)을 정치와 윤리의 이상으로 하는 도덕주의를 설파하여 덕치 정치를 강조하였다. 만년에는 교육에 전념하여 3,000여 명의 제자를 길러 내고, ≪시경≫과 ≪서경≫ 등의 중국 고전을 정리하였다. 제자들이 엮은 ≪논어≫에 그의 언행과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말샘

주6

618년에 중국의 이연(李淵)이 수나라 공제(恭帝)의 왕위를 물려받아 세운 통일 왕조. 도읍은 장안(長安)이며,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으나, 안사(安史)의 난 이후 쇠퇴하여 907년에 주전충(朱全忠)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7

중국의 육조와 당나라 때 성행한 한문 문체. 문장 전편이 대구로 구성되어 읽는 이에게 아름다운 느낌을 주며, 4자로 된 구와 6자로 된 구를 배열하기 때문에 사륙문(四六文)이라고도 한다. 우리말샘

주8

중국 당나라의 문인ㆍ정치가(768~824).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변려문을 비판하고 고문(古文)을 주장하였다. 시문집에 ≪창려선생집≫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9

1368년에 주원장이 강남(江南)에서 일어나 원(元)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세운 중국의 통일 왕조. 영락제 때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기고 몽고와 남해에 원정하여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뒤에 북로남왜에 시달리고 환관의 전횡과 당쟁, 농민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 1644년에 이자성(李自成)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10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부터 기원후 2세기에 후한(後漢)이 멸망할 때까지의 기간. 중국 왕조의 형태가 갖추어진 시기이다. 우리말샘

주11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여덟 명의 뛰어난 문장가. 당의 한유ㆍ유종원과, 송의 구양수ㆍ왕안석ㆍ증공ㆍ소순ㆍ소식ㆍ소철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12

명나라 영락부터 성화 사이에 출현한 시가. 정치적 안녕과 경제적 번영을 갖춘 시기에 유행한 이 시가는 성조의 덕을 노래하는 내용이나 교유 화답이 주를 이뤘으며, 화려하고 고답적인 성격을 띠었다. 우리말샘

주13

여덟 개의 짝으로 이루어진 한시 문체. 중국 명나라 초기에서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답안을 기술하는 데에 썼다. 우리말샘

주14

중국의 마지막 왕조(1616~1912).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후금국을 세우고, 그 아들 태종이 국호를 이것으로 고쳤으나 신해혁명으로 멸망하였다. 우리말샘

주15

중국 청나라의 학자ㆍ정치가(1668~1749). 자는 영고(靈皐). 호는 망계(望溪). 동성파(桐城派)의 시조로 당(唐)ㆍ송(宋)의 문장과 속어나 어려운 표현을 배제한 의법(義法)을 주장하였다. 저서에 ≪예기석의(禮記析疑)≫, ≪상례혹문(喪禮或問)≫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16

중국 청나라 때, 당송 팔대가의 문장을 표준으로 삼고 주희 등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던 고문(古文) 문장가들의 무리. 대표자 방포(方苞), 유대괴(劉大櫆), 요내(姚鼐) 등이 안후이성(安徽省)의 동성(桐城) 출신이어서 이렇게 불렀다. 우리말샘

주17

유교 도덕에 관한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 우리말샘

주18

고문학을 전승한 사람. 우리말샘

주19

중국 청나라 때의 학자ㆍ문장가(1731~1815). 자는 희전(姬傳). 당호(堂號)를 따서 석포(惜抱) 선생으로 불렸다. 1763년 진사가 되어 관직은 형부 낭중에 이르렀고, 동성파의 인물로 고증학에 반대하고 주자학을 옹호하였다. 저서로는 ≪고문사류찬(古文辭類纂)≫이 있다. 우리말샘

주20

중국 청나라의 정치가ㆍ학자(1811~1872). 자는 백함(伯涵). 호는 척정(滌正).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하고 양무운동에 노력한 공신이며 주자학자ㆍ문장가로도 유명하였다. 저서에 ≪증문정공전집(曾文正公全集)≫ 174권이 있다. 우리말샘

주21

특정 인물 또는 여러 사람이 한 말을 기록하거나 요약하는 형식의 문체. 고대 문학의 문체이다. 우리말샘

주22

모두 이치에 맞음. 우리말샘

주23

낡아 빠지고 케케묵은 말. 우리말샘

주24

옛 성현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 ≪역경≫ㆍ≪서경≫ㆍ≪시경≫ㆍ≪예기≫ㆍ≪춘추≫ㆍ≪대학≫ㆍ≪논어≫ㆍ≪맹자≫ㆍ≪중용≫ 따위를 통틀어 이른다. 우리말샘

주25

조선 후기 문체를 올바르게 되돌린다는 뜻의 문체반정이 행하여지면서, 모범적인 문체는 철두철미하게 경서(經書)에 근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정조의 문학관. 우리말샘

주26

실속이 없이 겉으로만 아름다움을 꾸밈

주27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부터 기원후 2세기에 후한(後漢)이 멸망할 때까지의 기간. 중국 왕조의 형태가 갖추어진 시기이다. 우리말샘

주28

험하고 공교로운 말씨)로 분식(粉飾; 내용이 없이 거죽만을 좋게 꾸밈

주29

천박하고 가벼움

주30

촌스럽고 속됨

주31

번잡하고 화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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