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주는 조선후기 이조좌랑,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634년(인조 12)에 태어나 1684년(숙종 10)에 사망했다. 영의정 김육의 손자이자 병조판서 김좌명의 아들이다. 서인 중 한당에 가담해 집권세력이던 산당에게 중용되지 못하다가, 1674년 자의대비 복상 문제로 제2차 예송이 일어나자 남인과 결탁해 산당을 숙청했다. 남인세력이 강화되자 다시 서인과 제휴해 송시열을 탄핵하려던 남인의 책동을 꺾는 등 남인세력 척결에 앞장섰으나 도가 지나쳐 서인 소장파의 반격을 받았고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분열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 강릉참봉 김흥우(金興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김육(金堉)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이며, 어머니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部) 도총관(都摠管) 신익성(申翊聖)의 딸이다.
1657년(효종 8) 진사가 되었으며, 1661년(현종 2) 왕이 직접 성균관에 거둥해 실시한 시험에서 성적이 우수해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 이듬해 증광 문과에 장원, 전적(典籍)이 된 뒤 이조좌랑 · 정언(正言) · 지평(持平) · 부교리(副校理) · 수찬(修撰) · 헌납(獻納) · 교리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674년 겸보덕(兼輔德)에 이어 좌부승지가 되었다.
당시 서인 중의 한당(漢黨)에 가담해 집권당이던 산당(山黨)에게 중용(重用)되지 못하였다. 그 뒤, 1674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제2차 예송이 일어나자, 남인 허적(許積) 등과 결탁해 송시열(宋時烈) · 김수항(金壽恒) 등 산당을 숙청하고 수어사(守御使)에 이어 도승지로 특진되었다.
그러나 남인의 정권이 강화되자 이를 제거하기 위해 다시 서인들과 제휴해 송시열을 제거하려는 남인들의 책동을 꺾어, 이 때부터 송시열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1680년 허적 등이 유악남용사건(油幄濫用事件: 왕실에서 쓰는 장막을 사사로이 사용해 일어난 사건)으로 실각한 뒤 이조판서가 되어, 남인의 잔여 세력을 박멸하고자 허견(許堅)`이 모역한다고 고변하게 하여 이들을 추방하였다. 그리고 그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682년 우의정으로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직하였다. 이어 김익훈(金益勳)과 함께 남인의 완전 박멸을 위해 전익대(全翊戴)를 사주해, 허새(許璽) 등 남인들이 모역한다고 고변하게 하는 등 음모를 꾀하였다. 1683년에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음험한 수법으로 남인의 타도를 획책했다 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로부터 반감을 사서 서인이 노론 · 소론으로 분열하는 원인의 하나를 제공하였다.
사후인 1689년 기사환국으로 공신호를 박탈당했다가 뒤에 복구되었다. 숙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 식암집(息菴稿)』 · 『 해동사부(海東辭賦)』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