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의 신도(新都)건설과 무기제조를 위하여 부가 제도(諸道)의 각 주현의 성잔(盛殘)에 따라 공철을 분정하면 각 주현에서는 다시 관내 농민들의 경작면적을 기준으로 공철량을 배정하여 수취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적 생산이 불가능하여 철물상인들로부터 매납할 수밖에 없게 되자, 가난한 농민들은 농기구나 솥을 바치는 폐단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1407년(태종 7) 정부가 이러한 수취방법을 폐지하고 철광이 있는 고을에 철장도회(鐵場都會)를 개설하여 농민을 부역시켜 공철을 채납하는 제도를 채택하였다. 철장도회제하의 공철생산도 농민들의 장거리 왕래, 식량의 스스로의 부담 및 농사의 피해 등 각종의 폐단이 있었다.
세조 초 종래 15만근에 달하던 공철을 반으로 감하는 동시에, 농민 각자의 형편에 따라 공철을 바치거나 쌀로써 대납하도록 하는 방법을 병행키로 하였다. 그러나 관인과 상인들이 결탁하여 대납제에 편승하여 농민에게 강요함으로써 결국 농민은 비싼 공철가를 강제로 물게 되었다.
이에 1470년(성종 1) 철장도회제를 부활하게 되었지만, 이 제도가 안고 있는 모순이 심화되자 1487년경 이 제도를 폐지하고 철광이 있는 읍에만 공철을 부과하는 수취제를 적용하였다. 이 수취제도는 대동법이 실시될 때까지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