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서금점철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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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사건
조선 순조 때 관서의 금광을 폐쇄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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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순조 때 관서의 금광을 폐쇄한 사건.
내용

1780년(정조 4)에 호조가 왕의 허가를 받아 평안도 자산(慈山)과 성천(成川)의 사금지를 채굴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시발로 하여 그뒤에는 주로 민간에 의한 비합법적인 채금업, 즉 잠채(潛採)가 성행하여 1784년에는 청천강(淸川江) 남북일대에까지 확대되었다.

그 뒤 1794년경에는 함경도와 황해도로 번졌으며, 순조 초기에는 이미 경기도·강원도·전라도에까지도 잠채광업이 실시되고 있었다. 이렇게 공적인 채금보다는 사적인 잠채가 확대됨에 따라 채금업의 폐단은 점점 커져갔다. 1808년(순조 8)에 우의정 김재찬(金載瓚)은 잠채광업의 확대에 따른 폐단을 종합하여 보고하였다.

즉, 그간의 잠채광업이 민간인의 사사로운 잠채가 아니라 서울과 지방의 각 관아와 결탁한 대규모 잠채행위로 국고에는 전혀 금점의 점세(店稅)가 납부되지 않고 있으며, 또한 채취한 사금이 청나라로 유출되고 있으므로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경우와 같은 공금(貢金)의 요구가 재현될 위험이 있고, 더욱이 잠채가 확대됨에 따라 농민들의 이농현상이 극심하여 전답이 황폐될 뿐만 아니라 채금지역의 전답과 분묘들이 파괴되고 곡가가 폭등하고 도적이 들끓는 형편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잠채광산은 물론 호조가 왕명을 받고 허가한 금점을 모두 철파하여야 하며, 만약 잠채를 방조하거나 묵인할 경우에는 관계된 관료 및 관청들은 모두 규제하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대해 순조도 동의하였으므로 결국 관서지방에 성행하던 금광업은 모두 혁파되었다.

참고문헌

「이조개항전후의 광업정책연구」(유승주, 『아세아연구』 55, 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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