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지방의 곡식을 색리(色吏)와 함께 서울로 운송하는 경우, 배를 타는 감관을 영선감관(領船監官), 곡식을 바치는 일을 관리하는 감관을 봉상감관(俸上監官)이라 했다.
이들이 서울로 올라올 때는 지방관의 허가를 받은 뒤에 곡식을 운송할 수 있었다. 봉상감관은 업무의 성격상 사대부 가운데에서 선발하였는데, 이를 기피하면 도피차역률(圖避差役律)로 처벌을 받도록 규정되었다.
이들과는 그 성격이 다른 것으로 기술직의 성격을 띤 감관이 여러 형태로 존재했는데, 그 가운데에서 유황광산(硫黃鑛山) 개발을 독려하던 유황감관의 존재양태는 매우 특이하다.
유황감관은 유황광산을 발견하여 군아문(軍衙門)에 처음 보고한 자가 임명되는 것이 일반적 관례였다. 이들은 대개 양인층으로 유황에 대한 기술이나 지식을 가진 자들인데, 군아문의 설점수세하(設店收稅下)에서 유황감관이라는 직책을 받고 유황점(硫黃店)을 경영하게 된다.
그러나 감관의 자리는 항시 불안한 것이었고 신분상에 있어서도 미천하였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국가의 모든 착취를 배제하는 한편 신분상의 상승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합법적·비합법적인 방법을 막론하고 재부의 축적에 노력하여 산림의 벌채, 벌꿀업자들에 대한 수세 등의 행위를 자행함으로써 백성들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