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천(陽川). 숙종대의 대신 허적(許積)의 서자이다. 교서관(校書館) 정자를 지냈다. 숙종 초년에 허적을 비롯한 남인세력이 도체부(都體府)를 복설시켜 병권을 장악하려고 하자 서인들은 이를 반대하였다.
때마침 그는 부친의 세력을 믿고 황해도에서 수천 그루의 재목을 도벌하여 집을 짓는다든가, 남의 처를 약탈하는 행위를 하여 비난을 받았는데,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인 복선군(福善君)과 내왕이 있음을 기화로 하여, 그가 역모를 꾀한다고 종척인 김석주(金錫胄) 등으로부터 고변당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4월 12일 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능지처참당하고 복선군 · 복창군(福昌君) · 복평군(福平君)과 허적을 비롯한 남인 실권자 등이 죽음을 당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후 남인이 세력을 잡자 이 사건이 무옥(誣獄)임을 주장하여 허적 등 처벌을 당한 자들이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버림.)되었으나, 허견과 복선군은 비록 목전에서 반역하지는 않았지만,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이유로 신원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