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처음에는 삼남도검찰사(三南都檢察使)가 관리하였다. 그러나 정묘호란이 끝난 1628년(인조 6) 11월에 광주목사(廣州牧使)에게 남한산성 방어사를 겸하게 했다가 1632년경에 수어사가 임명되었다.
초기의 수어사는 경기 일대를 전관하는 총융사(摠戎使)의 직권 아래 그 지휘·감독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 1634년 2월에는 수어사가 남한산성의 모든 군사행정을 독자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그러나 군사책임자인 수어사가 있고 행정책임자인 광주부윤(廣州府尹 : 인조 14년 2월에 광주목사가 부윤으로 승격)이 있는 이원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1652년(효종 3)에 광주부윤을 수어부사로 삼아 일원적 체제로 개편시켰다. 1683년(숙종 9) 광주부윤을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수어사의 책임을 맡게 함으로써 수어청이 단일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690년에 광주유수의 질이 높아 재신(宰臣)이 파견되기 때문에 곧 경관직(京官職)으로 교체되어 군무가 소홀해진다는 폐단이 지적되어 다시 이원화되었다. 그 뒤 1750년(영조 26) 국가 경비를 줄여보자는 뜻으로 그 해 7월에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1795년 8월에는 광주부를 유수로 승격시켜 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고, 유수가 자주 교체되는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유수의 임기를 2년으로 정하였다. 이렇듯 지휘체계의 모순으로 수어사가 자주 교체되는 바람에 남한산성의 방어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