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초의 학자들은 양명학의 폐단과 명나라의 멸망에 자극되어 경세(經世)를 위해서 실사(實事)에 기초해서 옳은 것을 구하는 것, 즉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용으로 하는 실학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그 학문적 배경이 되는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에서 송명이학자들의 연구방법을 배척하고, 한 · 당나라의 훈고학(訓詁學)을 계승하여 실증적인 연구방법을 채택하였다. 이처럼 경학과 사학에서의 실증적인 연구방법이 발전하여 청대의 고증학이 되었다.
고증학의 주류는 경학을 중심으로 하여 저장(浙江)의 서쪽에서 일어난 이른바 절서학파(浙西學派)였으며, 그 개조는 고염무(顧炎武)였다.
고염무는 명나라 말의 학풍에 대하여 “지금의 군자는 빈객 · 문인 등 백 수십 인을 모아놓고 서로 더불어 심(心)을 말하고 성(性)을 말하며, 많이 배워서 아는 방법을 놓아두고 단번에 깨달으려고 하는 일관(一貫)의 방법을 구하며, 사해(四海)의 곤궁함을 그대로 놓아두며 언급하지 않고 위미정일(危微精一), 즉 인심(人心)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오직 미약하니, 오직 정밀하게 하고 오직 한결같이 하여 인심을 버리고 도심을 밝혀야 한다고 하는 것만을 강론하고 있으며”, “지금의 학자는 우연히 깨우쳐 알게 된 것이 있으면 선유(先儒)의 학설을 다 버리고 그 위에 걸터 앉으며, 배우지 않은 것은 일관이라는 말을 빌려 자기의 고루함을 수식하고, 도덕적인 행위가 없으면 성명(性命)의 향(鄕)에 도망하여 남으로 하여금 힐난하지 못하게 한다.”고 맹렬히 비난하고, 또한 “한 사람이 천하를 바꾸어 그 유풍(流風)이 100여 년이나 오래 계속된 것으로는 옛날에는 왕연(王衍)의 청담(淸談), 왕안석(王安石)의 새로운 학설이 있었지만, 지금에는 왕수인(王守仁)의 양지(良知)가 그것이다.”고 하여 그 죄를 왕수인에게 돌리고 있다.
왕수인은 양명학의 창시자이다. 왕수인에 의해 이루어진 양명학은 심즉리설(心卽理說) ·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 · 치양지설(致良知說)이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주자학이 심의 본질을 성이라고 하여 성을 인식하기 위한 복잡한 수양론을 전개한 데 반하여, 양명학은 인간의 심 그 자체가 지닌 본질성을 강조하여 심이 지닌 양지를 이루기만 하면 된다고 함으로써, 간명하고도 강렬한 수양론을 제시하였다.
양명학은 후에 외적인 이(理)를 중시하는 정통양명학파(일명 江右派)와 내적인 심을 중시하는 신양명학파(일명 泰州派) 또는 왕학좌파로 나누어진다.
정통양명학파는 경서를 근거로 치양지설을 논하고 착실한 수양론을 전개함으로써 주자학과의 간격을 좁혔지만, 신양명학파는 심의 본체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신양명학파의 논리에 의하면, 심이 인욕(人欲)에 의하여 오염되지만 않으면 심은 본래 진리이므로 인간은 심이 발현하는 그대로를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논리는 다시 심의 발현 그대로를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실천적인 측면과 인욕에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점을 강조하는 수양적인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전자는 인간의 욕망까지도 전적으로 긍정하게 되어 쾌락주의로 흐르게 되고, 후자는 인간의 육체를 인욕의 근원으로 파악함으로써 자살찬양론으로 빠지게 되어 많은 폐단을 가져오게 된다.
이 학파는 왕용계(王龍溪) · 왕심재(王心齋) · 안산농(顔山農) · 나근계(羅近溪)를 거쳐 명나라말의 이탁오(李卓吾)에 이르지만, 이탁오의 자살로 인하여 종말을 고한다.
이와 같이 양명학의 말류가 퇴폐하게 되고, 사람들도 싫증을 느끼게 됨으로써 양명학은 저절로 소멸하게 되는 상황이었는데, 큰 소리로 질타하여 그 소멸을 재촉한 자가 바로 고염무였던 것이다.
고염무는 정주학(程朱學)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을 피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어찌 따로 이학(理學)이라는 것이 있겠는가, 경학이 바로 이학이다. 경학을 놓아두고 이학을 말하는 자가 있고서부터 사설(邪說)이 인하여 일어났다.”고 한 말을 보면, 이학의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송 · 원 · 명 이래로 이학을 말하는 자들이 차라리 공맹(孔孟)에게 죄를 얻었으면 얻었지 감히 주(周) · 정(程) · 장(張) · 소(邵) · 주(朱) · 육(陸) · 왕(王)을 논하지는 못한다고 할 정도로 존귀한 학벌을 이루어 다른 학문들을 무시하던 이학가의 지위를 무너뜨리는 사상계의 일대 해방운동이었다.
이와 같이 송명이학을 공격하여 고증학의 개조가 된 고염무가 지닌 학문연구방법이 지닌 특징은 귀창(貴創) · 박증(博證) · 치용(致用)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귀창이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하여 깨달아 얻은 바가 있으면 문득 기록하였다가,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때때로 개정하고, 혹 옛 사람 중에 나보다 먼저 밝혀놓은 것이 있으면 이를 삭제한다.”고 한 그의 말처럼, 창의성을 중히 여긴다는 말이다.
다음으로 박증이란 어떤 일을 논할 때 반드시 널리 증거를 찾아 확인하는 과학적 연구방법인데, 이 박증의 정신이 바로 고증학의 대표적인 연구방법이다.
치용이란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것으로서, 명나라 말의 첩괄파(帖括派) · 청담파(淸談派) 등의 공리공론을 일삼는 태도에서 탈피하여 현실과 관련된 학문을 함으로써, 학문과 사회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려는 학문 태도이다.
고염무에서 비롯된 절서학파는 호위(胡渭) · 염약거(閻若璩)에 의하여 크게 발전했으며, 건륭가경시대(乾隆嘉慶時代)에 이르러 혜동(惠棟) · 전대흔(錢大昕)을 중심으로 한 오파(吳派)와 대진(戴震) · 단옥재(段玉裁) · 왕염손(王念孫) · 왕인지(王引之)를 중심으로 한 환파(晥派)로 나누어지면서, 고증학의 전성기를 맞아 일대의 학계를 풍미하게 되었다.
청나라 말에 이르러 이 학풍은 유월(兪樾) · 장병린(章炳麟) · 왕국유(王國維) 등에 의하여 계승되지만, 사회적인 혼란을 계기로 쇠퇴하게 된다.
그밖의 학자로는 모기령(毛奇齡) · 조어중(趙御衆) · 주척(周惕) 등을 들 수 있는데, 그 연구의 대상이나 방법에 따라 이들을 다시 훈고파 · 음운파(音韻派) · 금석파(金石派) · 교감파(校勘派)로 나누기도 한다.
사학(史學)을 중심으로 하여 저장의 동쪽에서 일어난 절동학파(浙東學派)는 황종희(黃宗羲)에서 비롯되어 만사동(萬斯同) · 전조망(全祖望)을 거쳐 장학성(章學誠)에 이르지만, 고증이 그 본령은 아니었다.
고증학의 내용은 주로 문헌적인 고증에 의하여 문자 · 음운 · 훈고를 연구하고 그를 토대로 하여 고전을 정비하고 해명하는 것이었다. 그 실증성 · 과학성을 가진 귀납적인 방법과 비판적인 정신에 의한 연구성과는 오늘날 중국의 고전을 다루는 데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지대한 것이다.
그러나 고증학은 어디까지나 문헌 연구방법에서 문헌 고증에 치우친 나머지 사상적인 면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고증학파 이외에도 청나라 초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왕부지(王夫之)와 안원(顔元)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은 독자적인 학파를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조선에서의 전개과정]
중국에서 고증학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대는 한국의 조선 후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창업 이래 지속되어왔던 정치적 ·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역사적 시대상에 민감한 학자들은 정치적 · 경제적 대응책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실학자들의 정치적 제도개혁을 주로 하는 저술과 농공상기예(農工商技藝)에 대한 저술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정치적 제도개혁을 주로 하는 저술로는 이른바 경세치용파로 일컬어지는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 정약용(丁若鏞)의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이 있고, 농공상기예에 대한 저술로는 이용후생파로 일컬어지는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議)』,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정치적 · 경제적 대응책을 모색하던 실학자들은 그들의 학문적 기반이 되는 유교경전에 대한 전통적인 연구방법, 즉 주자학적 연구방법과 다른 새로운 연구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청조의 고증학은 각광을 받게 되었다.
청조의 고증학을 수용하여 대성한 학자로는 김정희(金正喜)와 정약용을 대표로 들 수 있다. 김정희는 24세 때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가 된 아버지 노경(魯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는데, 그 때 고증학의 대가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게 되었고, 수차에 걸친 교유 끝에 그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밖에도 이정원(李鼎元) · 과보수(戈寶樹) · 이임송(李林松) · 조강(曹江) · 주학년(朱鶴年) · 홍점전(洪占銓) · 유화동(劉華東) 등의 명사들과도 교유하게 되었고, 형부상서 김광제(金光悌)부자와도 알게 되었다.
옹방강은 금석학과 서학(書學)의 대가였는데, 김정희가 이임송의 안내로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김정희에게 많은 금석서화(金石書畫)를 보여주면서 하나 하나 설명을 해주기도 하였다. 김정희가 후일 금석학에 몰두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에 영향받은 바 컸을 것이다.
옹방강을 방문하여 학문적인 교유를 해오던 김정희는 다시 완원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완원은 당시 고증학의 태두였다. 김정희를 본 완원은 곧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깨닫고, 송대의 명차(茗茶) ‘용단승설(龍團勝雪)’을 대접하며 환대하였다 한다.
완원의 연경법(硏經法)은 그의 『의유림전서(擬儒林傳序)』에 보이는데, 김정희는 귀국 후 그 설에 따라 훈고를 정구(精求)하고 실천궁행을 힘써야 한다고 하는 「실사구시설」을 지어, 당시 유학자들이 공소에 흘러 실사구시에 충실하지 못한 것을 개탄하였다.
정약용은 이익의 경세치용파에 근거하면서 천주교 및 이용후생파의 농공기술의 혁신과 중상이론을 흡수하고 경세치용학을 완성하여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그도 역시 실학의 부동하고 확고한 논리적 근거를 구축하기 위해 모든 경전이나 경학에 대한 새로운 연구방법을 모색한 나머지, 청조의 고증학적인 연구방법에 기울게 되었다.
그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재래의 성리학적인 연구방법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하였다. 즉, 『주역대전(周易大傳)』에 ‘궁리진성이지어명(窮理盡性以至於命)’이라 하였고, 『중용』에 ‘능진기지성 능진인지성 능진물지성(能盡己之性 能盡人之性 能盡物之性)’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성리의 학에는 근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옛날의 학문하는 사람은 성이 천(天)에 뿌리박고 있음을 알았고, 이는 천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으며, 인륜이 달도(達道)가 됨을 알았다.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가지고 하늘 섬기는 근본으로 삼고, 예악형정(禮樂刑政)을 치인(治人)의 도구로 삼았으며, 성의정심(誠意正心)으로써 하늘과 사람을 맺어주는 추뉴(樞鈕)로 삼았으니, 이를 인(仁)이라 하였다.
그 인을 실행하는 실행원리를 서(恕)라 했고, 그 인을 실시하는 시행원리를 경(敬)이라 했으며, 그 인을 스스로 체득하여 주체를 확립하는 것을 중화(中和)의 용(庸)이라 했으니, 이와 같을 따름이지 달리 많은 말이 필요 없다.
“오늘날 성리학을 하는 자들은 이 · 기 · 성 · 정 · 체 · 용 · 본연 · 기질 · 이발(理發) · 기발 · 이발(已發) · 미발(未發) · 단지(單指) · 겸지(兼指) · 이동기이(理同氣異) · 기동이이(氣同理異) · 심무선무악(心無善無惡) · 심유선유악(心有善有惡) 등을 말하여 세 줄기, 다섯 가장귀, 천 가지, 만 잎으로 점점 세분하여 털끝까지도 나누고, 실오라기도 쪼개어 서로 꾸짖고 서로 호응하며 마음을 어둡게 하여 답답하게 연구하면서 소리를 높이고 목청을 돋우어 스스로 천하의 고묘(高妙)함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여, 동으로 떨치고 서로 부딪치며 꼬리만 붙잡고 머리를 잃고서 대문마다 하나의 깃발을 세우고 집집마다 하나의 보루를 쌓으니, 평생토록 노력하여도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여, 성리학적 연구방법을 비판하고 고증학적 연구방법을 채택하였다.
정약용은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맹학(孔孟學) 그 자체에 접근하려 함으로써, 한대의 훈고학마저도 주충석어(註蟲釋魚)의 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그 극복을 시도하였다.
정약용은 강진으로 귀양갔다가 47세 때 다산(茶山)으로 옮기면서부터 풀려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10년 동안, 한위(漢魏)로부터 명청(明淸)까지의 경전 주석들을 모으고, 널리 참조하여 그의 경학을 완성하였다.
실학의 고증학적 일면을 담당한 김정희와 정약용을 비교해볼 때, 김정희는 아무래도 금석고거학(金石考據學)으로서 금석문의 고거라고 하는 논증 위주의 학에 기울고, 정약용은 경전고증학(經典考證學)으로서 경전의 고의(古義) 천명을 위한 고증 위주의 학에 기울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정희와 정약용 이후 한국의 고증학은 학파를 형성하는 단계에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이재(李栽) · 이상정(李象靖) · 이진상(李震相) · 기정진(奇正鎭) · 이항로(李恒老) · 임성주(任聖周) 등에 의하여 성리학이 재연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