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 ()

한문학
개념
한자와 한문을 표기 수단으로 하는 문학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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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한문학(漢文學)은 한자와 한문을 표기 수단으로 하는 문학 양식이다. 한자와 한문으로 표기된 동양의 고전을 포함하여 한국이나 일본·베트남에서 한자와 한문으로 자신들의 사상과 감정을 담은 창작 문학을 가리킨다. 한자문화권에서 생성된 일체의 문학을 한문학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의 한문학은 중국의 문자와 문학 형식을 차용하여 우리 민족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문화적 전통과 역사적 환경 속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다른 한자문화권 나라들의 한문학과 비교되는 고유성과 차별성을 가진다.

정의
한자와 한문을 표기 수단으로 하는 문학 양식.
1. 한문학의 개념

한문학이란 한자한문을 표기 수단으로 하는 문학이다. 한자와 한문으로 표기된 동양의 고전을 포함하여 한국이나 일본 · 베트남에서 한자와 한문으로 자신들의 사상과 감정을 담은 창작 문학을 가리킨다.

한자 주1에서 생성된 일체의 문학을 한문학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의 한문학은 중국의 문자와 문학 형식을 차용하여 우리 민족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문화적 전통과 역사적 환경 속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한문학은 중국의 한문학을 포함하여 다른 한자 문화권 나라들의 한문학과 비교되는 고유성과 차별성을 가진다.

전근대 시기의 문학이라 하면 순수문학만이 아니라 공용문이나 실용문까지도 포괄하고 또한 역사와 철학의 내용을 아우르기 때문에, 한문학의 개념은 한자와 한문으로 된 순수문학에 제한할 필요 없이 주2을 종합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한문학의 갈래

한문학의 갈래는 시기와 기준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단일한 방식으로 정리되기 어렵다. 대체로 한문학은 크게 한시(漢詩)와 한문(漢文)으로 나뉜다. 본래 중국에서 ‘한시’나 ‘한문’이라 하면 주3의 시(詩, 운문)와 문(文, 산문)을 말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한시’나 ‘한문’이라 할 때는 ‘한자로 된 시와 문’을 두루 가리킨다.

중국의 한문학이 크게는 시 · 문 · 주4 · 소설 · 주5 · 문학비평 등으로 분류되는데, 우리나라의 한문학은 대체로 한시 · 한문 · 한문 소설 · 문학 비평의 갈래로 분류한다. 중국의 조비(曹丕)나 육기(陸機)의 「전론논문(典論論文)」 또는 「문부(文賦)」를 보면 시(詩) · 부(賦) · 비(碑) · 뇌(誄) · 명(銘) · 잠(箴) · 송(頌) · 논(論) · 주(奏) · 설(說) 등의 갈래가 보이는데, 이것은 『문선(文選)』을 거쳐 주6』에서 이론적 체계가 확립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동문선(東文選)』이 한문학 갈래의 전범이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辭) · 부(賦) · 고시(古詩) · 율시(律詩) · 절구(絶句) · 배율(排律) · 조칙(詔勅) · 교서(敎書) · 제고(制誥) · 책문(冊文) · 비답(批答) · 표전문(表箋文) · 계(啓) · 장(狀) · 노포(露布) · 격문(檄文) · 잠 · 명 · 송 · 찬(贊) · 주의(奏議) · 차자(箚子) · 잡문(雜文) · 서독(書牘) · 기(記) · 서(序) · 설 · 논 · 전(傳) · 발문(跋文) · 치어(致語) · 변(辨) · 대(對) · 지(志) · 원(原) · 첩(牒) · 의(議) · 잡저(雜著) · 책제(策題) · 상량문(上樑文) · 제문(祭文) · 축문(祝文) · 소문(疏文) · 도량문(道場文) · 재사(齋詞) · 청사(靑詞) · 애사(哀詞) · 뇌문(誄文) · 행장(行狀) · 비명(碑銘) · 묘지(墓誌).

이것들을 다시 글의 성격별로 다시 구분하면, 시부류(詩賦類) · 주7류(論辨類) · 주8류(奏疏類) · 조령류(詔令類) · 주9류(序跋類) · 증서류(贈序類) · 전지류(傳志類) · 잡기류(雜記類) · 사독류(私牘類) · 소설류(小說類) 등이다. 오늘날의 문학적 통념에서 보면 문예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문학 갈래 가운데 대표적 장르인 한시와 한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시는 주10주11의 두 부류로 나뉜다. 근체시란 운율이 일정한 형식을 따르는 것으로, 율시(律詩)절구(絶句)가 여기에 속한다. 고시란 운율의 고정된 형태가 없으며 다시 고시와 가행(歌行)의 두 부류로 나뉜다.

운율은 음절의 억양과 장단의 배열법을 말한다. 한자 한 글자는 반드시 1음절이므로, 1구의 글자와 음절의 수는 동일하다. 근체시에서는 매 구의 글자 수가 일정해서, 1구가 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것을 오언시(五言詩), 일곱 글자로 이루어진 것을 칠언시(七言詩)라고 한다. 따라서 율시에는 오언율시(五言律詩)와 칠언율시(七言律詩)의 두 종류가 있고, 절구도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칠언절구(七言絶句)의 두 종류가 있다. 그밖에 육언시(六言詩)도 있다. 율시는 8구가 원칙이다. 10구나 12구, 혹은 그 이상의 것을 배율(排律) 혹은 장율(長律)이라고 한다. 절구는

고체시주12도 5언과 7언의 구가 대부분이다. 이 외에 5언의 구와 3언의 구를 섞은 것은 삼오칠언(三五七言)이라고 한다. 이외에 악부(樂府)가 있다. 악부란 한대(漢代)에 궁중 음악을 관장한 관청의 이름인데, 거기서 연주되는 가곡과 노랫말도 악부라고 부른다. 관청이 없어진 뒤 시체(詩體)의 명칭으로 오랫동안 존속하였으며, 어떤 악곡은 후대에 가사가 다시 만들어진 것도 있다. 악부체의 시에는 5언이나 7언의 규칙적인 형태의 작품도 있으나, 주13의 형태가 많다. 악부체 시 가운데 옛날의 제목을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창작물을 주14나 신제악부(新題樂府)라고 부른다. 그리고 악부와 비슷한 가행은 주로 7언 장편의 형식이며, 넓은 의미로는 악부체에 포함된다. 악부는 근체시로도 고체시로도 만들어진다.

한시의 소재와 내용은 다양하다. 자연물이나 생활 주변의 사물을 노래한 주15, 역사를 노래한 주16, 역사를 노래하되 무상감을 주로 드러낸 회고시(懷古詩), 옛일을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고사시(故事詩), 개인의 회포를 표출한 영회시(詠懷詩), 사회의 문제를 다룬 사회시(社會詩), 풍속을 노래한 풍속시(紀俗詩), 철학적 내용을 다룬 도학시(道學詩), 불교적 깨달음을 다룬 선시(禪詩), 특정 인물을 그리워하여 지은 회인시(懷人詩), 서한을 대신하거나 기념을 하여 주는 증답시(贈答詩), 여성의 정감을 담은 염시(艶詩) 등이 있다.

또한 한시는 음악성이 있다. 한시는 주17을 하여 운을 맞추고 주18으로 음의 높낮이를 고르므로, 운율의 아름다움이 있다. 한시의 가장 짧은 형태는 오언절구와 같이 20자 이내지만 표의문자가 지닌 특징을 이용하여 적은 어휘를 가지고도 깊고 많은 뜻을 표현한다. 한정된 글자로 다양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주19용사(用事)를 활용하였다. 그리고 한시는 구조적으로 두 구를 짝지어 놓는다.

한문학 갈래 가운데 한문은 특별히 한문 산문을 가리킨다. 산문은 운문(韻文)이나 변려문(騈儷文)과 상대되는 개념이다. 운문은 시(詩)·사(詞)·곡(曲)·부(賦) 등을 포괄하며, 변려문은 대우(對偶)와 주20을 강구한다. 이러한 운문과 변려문을 제외한 글을 산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육조 시대 변려문이 발달하기 이전인 진한(秦漢) 때 이루어진 경사제가(經史諸家)의 산문 문체와 당(唐)나라의 한유(韓愈) 이래 산문의 주류를 이루어 온 문체를 고문(古文)이라고 한다.

한문 산문의 분류를 가장 구체적으로 구분한 것은 청(淸)나라의 주21가 지은 『고문사류찬(古文辭類纂)』이다. 요내는 한문 산문의 문체를 엄격하게 구분하였으니, 사부(辭賦)‧주의(奏議)‧서설(書說)‧조령(詔令)‧서발(序跋)‧전장(傳狀)‧비지(碑誌)‧잡기(雜記)‧잠명(箴銘)‧송찬(頌贊)‧애제(哀祭) 등 13분류이다. 한편 현대의 진필상(陳必祥)은 모든 문장을 언어 형식에 따라 분류하여 운문‧산문‧변문으로 나누고, 산문을 다시 표현 수법과 응용 범위에 따라 기서성(記敍性) 산문, 설리성(說理性) 산문, 실용성 산문의 3부류로 나누기도 하였다.

산문과 비슷한 문체가 바로 변려문과 사부이다. 변려문은 사륙문(四六文)이라고도 한다. 4언과 6언의 구를 기본으로 하여 각종의 대구를 사용하며, 평측‧압운 등으로 성음을 조화시키고 전고를 많이 사용하며, 화려한 단어들을 구사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 문체는 제량(齊梁) 때 부(賦)에서 변화되어 나와 만당(晩唐) 때에 성행하였고, 송대(宋代)에 와서 일변하여 원(元)나라와 명(明)나라로 이어졌다. 당나라의 한유‧유종원(柳宗元) 등이 이른바 고문 운동을 전개하자 쇠퇴하기도 했지만, 공적인 문서에서는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임금의 주22이나 신하가 올리는 소체(疏體)와 주의(奏議)는 대부분 이 문체를 사용하였다.

한편 사부는 운문이 산문화한 형태로 대구법과 주23을 지키면서 아름다운 언어와 섬세한 표현에 힘썼다. 사(辭)는 초사(楚辭)에서 기원하여 서정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고, 부(賦)는 한대(漢代)의 부에서 기원하여 서사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지만, 한대의 부 가운데 초사의 계통을 이은 것을 사부라고 주24하였다.

한문 산문이기도 하면서 한문학에서 별도의 위상을 지닌 장르는 한문 소설이다. 우리나라의 한문 소설에는 넓게 보아 전기체(傳奇體), 주25, 전(傳) 형식의 소설, 본격 중단편 한문 소설과 같이 본래 한문 문체를 이용하여 창작된 소설과, 민간에서 구전되는 설화나 일화를 한문으로 표기한 야담(野談), 그리고 이 야담 형태를 빌되 소설의 요소를 더 갖춘 한문 단편 등이 있다.

나말여초에는 전기체 소설이 발달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등에 전하는 「수삽석남(首揷石枏)」 · 「조신(調信)」 · 「김현감호(金現感虎)」 · 「최치원(崔致遠)」은 본래 전기체 소설이었을 것이며, 『삼국사기』주26」이나 「가실전(嘉實傳)」도 전기체 소설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가전체는 주27의 형태를 빌어 논술을 행하는 양식이지만, 소설적 구성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설총(薛聰)이 지은 「화왕계(花王戒)」[^28]는 우언의 성격이 더 짙지만, 고려시대 중후기의 가전체 서사물은 소설적 요소가 짙다.

전(傳) 형식의 소설은 실존 인물을 대상으로 전을 지으면서 소설적 구성을 도입한 형태를 말한다. 허균(許筠)「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등 다섯 편의 전 작품과 박지원(朴趾遠)「허생전(許生傳)」」 · 「마장전(馬駔傳)」 등이 이에 속한다. 본격적인 중단편 한문 소설은 김시습(金時習)『금오신화(金鰲新話)』에서 비롯되었다. 『금오신화』의 각 단편들은 본격적인 전기 소설의 형식이다. 17세기에는 「운영전(雲英傳)」과 같이 사실성이 높고 주제 사상이 탁월한 작품들이 출현하였다.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중단편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는 5편의 작품을 한데 모은 소설집이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5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오(金鰲)’는 경주 남산(南山)의 금오봉을 가리키고, ‘신화(新話)’는 새로운 이야기란 뜻이다. 『금오신화』는 민중의 상상력 세계에서 소재를 취하고 민족의 현실과 사상에서 주제를 찾았다. 「이생규장전」은 재자가인(才子佳人)을 주인공으로 삼아, 아름다운 문언문(文言文)으로 이야기를 서술하였으며 신비로운 내용을 그려내었다. 이것은 전기 소설의 일반적인 성격과 통한다.

그런데 『금오신화』는 현실 속에서 제도·인습·전쟁·인간의 운명과 대결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표현해 내었다. 이승이든 저승이든, 속세든 용궁이든, 실재하는 현실 공간이든 상상 속에서 그려낼 수 있는 상징의 공간이든, 그 어떤 것도 독립적으로 완벽한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이 소설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가 결함이 있는 세계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렇게 결함이 많은 세계 속에 살아가는 등장 인물들은 모두가 완전한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슬픔을 느끼는 존재들이며, 독자들은 이 소설을 통하여 그 슬픔을 공감한다.

조선 후기에는 유몽인(柳夢寅)『어우야담(於于野談)』 이후 민간이나 사대부 생활 주변의 야담을 수집하여 엮은 『청구야담(靑丘野談)』 · 『계서야담(溪西野談)』과 같은 야담집이 다수 출현하였다. 이 야담집들에 실린 서사물은 설화와 다름없는 것도 있지만 소설적 수준에 이른 것들도 있다. 소설 수준에 이른 야담을 특별히 한문 단편이라고 부른다. 야담은 구연과 기록을 통하여 정착되어 구연 단계의 주제 사상이 기록 단계에 와서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한문 단편은 현실 반영의 측면에서 사실성이 매우 높다.

3. 국문학과의 관계

우리나라의 한문학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최치원(崔致遠) 이후이고, 그 후로 고려시대, 조선시대 1천 년 동안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한문학이 주류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 기간에 국문학은 존재감이 약화하긴 했어도 축출 혹은 소멸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한문학의 형세에 밀려서 주변부에 놓이긴 했지만 꾸준히 명맥을 이어왔다. 요컨대 우리나라 문학사는 한문학과 국문학의 이원 구도를 형성하여 전개된 것이다. 그러다가 20세기에 신문학이 성립하면서 이러한 이원 구도는 사라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한문학과 국문학 이 양자의 관계를 상호 부정적이고 배타적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한문학의 형세에 밀려서 국문학이 위축되었던 것은 현상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자국어의 표기 수단이 없는 실정에서 중국의 한자와 한문을 수입하여 사용한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중심의 보편주의가 통행하는 시대에 한자와 한문이라는 보편적 문자를 사용하는 일 또한 당연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한자와 한문으로 문자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국어와의 괴리를 해소하기 위해 향찰 · 이두 · 구결 등의 주29 표기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15세기에 자국어의 표기 수단으로 한글을 창조하여 쓰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와 한문이 여전히 지식과 소통의 중심이었고 한문학의 주류적 위상은 흔들림이 없었다. 한자 문화권의 보편주의가 우리의 사고와 현실을 지배하는 상황이었기에, 이원 구도를 해체할 단계에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국문학은 한문학의 주류적 위상에 도전하기보다는 상보적인 관계를 취해 자기 존재를 유지한 것이다.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한문학과 국문학의 이원 구도는 신라시대에 한시와 향가가 병존한 이후로 조선시대까지 이 구도는 활발하게 발전하여 다채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17세기는 문학사에서도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17세기로부터 소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양자의 관계 양상 또한 그 전후로 변모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기본적으로 사대부 문학의 시대다. 17세기 이전에는 사대부 문학의 범주 내에서 한시와 시조‧가사로 이원 구도를 형성하였다면, 17세기 이후 소설 시대로 와서는 이원 구도의 중심축이 소설 양식으로 이동하여 그 내부에서 한문체 소설과 국문체 소설이 병행하면서 흥미로운 변화를 연출했다. 물론 17세기 이후에도 사대부 문학은 엄연히 존속했고 한시와 국문 시가의 병행 현상 또한 그대로였지만 그런 가운데서 이러한 변모가 일어난 것이다. 당시 국문 시가는 사대부층의 가창의 요구에 따라 출현한 것에 반해 국문 소설은 주로 여성과 서민층의 요구에 호응한 것이었다. 소설 양식에서 국문체와 한문체는 활발하게 상호 영향을 주면서 독자층을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나라 문학사의 획기적인 변화는 17세기 이래 연출된 한문학과 국문학의 관계 양상의 활발한 움직임에서 일어났으며, 이후로 20세기 신문학이 성립할 때까지 이원 구도 혹은 상호 영향 관계는 계속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4. 한문학의 역사적 전개

4.1 상고 시대의 한문학

우리나라에 한자와 한문이 수용된 시기는 한사군(漢四郡) 설치 이전으로 소급되는 듯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구려는 건국 초 이른 시기에 한문을 사용하여 『유기(留記)』 1백 권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신라는 3세기에 이르러 한자와 한문을 널리 사용하였다는 증거가 있다. 375년에 백제고흥(高興)『서기(書記)』를 편찬하고, 545년에 신라의 거칠부(居柒夫)『국사(國史)』를 편찬하였으며, 600년에 고구려의 이문진(李文眞)이 『유기』를 바탕으로 『신집(新集)』 5권을 편찬하는 등, 삼국은 모두 일찍부터 한문으로 자국의 역사를 편찬하였다.

당시의 문인 지식인들은 한문학으로 자기표현을 하기보다는 국가의 역사를 정리하고 나라의 위업을 알리는 일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14년에 이루어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는 현전하는 한문학 작품 가운데 연대가 확실하고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구려 건국의 내력을 서두에 들고 광개토왕의 영웅적인 행적을 서술한 내용이다. 고구려의 주30, 신라의 주31, 진흥왕의 주32금석문(金石文)도 한문으로 나라의 위업을 드러내는 의도에서 제작된 것들이었다. 한편 645년 무렵에 이루어진 백제의 주33」는 대우법에 충실한 변려문의 특색이 뚜렷하고, 이밖에 칠지도(七支刀)의 명문(銘文),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효문제(孝文帝)에게 보낸 국서(國書), 을지문덕주34」, 신라 진덕여왕주35」, 신라 문무왕(文武王)의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 등 한문으로 이루어진 외교 문서가 남아 있다.

삼국시대에는 강력한 왕권 체제의 유지를 위하여 사상적 논리 체계가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이전의 무격사상(巫覡思想)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는 왕권을 중시한 중앙 집권으로 결속하기에는 부적당한 것이었다. 이에 불교를 도입해서 새로운 사상 체계를 수립하기에 이르렀고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한문학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 오게 하였다. 첫째 불교의 설화 문학과 시가를 낳게 하여 문학을 한층 세련되게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 나타난 설화나 향가가 그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불경(佛經) 등이 주석되고 교리가 보급됨에 따라 문학 사상이 심화되고 문장이 세련되어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주36 등에서 그러한 명문장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불교와 함께 유교의 유입이 있었다. 특히 신라시대 중반 이후에는 유교 정치 사상을 표방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교육 내용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강수(强首)의 이야기에서 확인되는데, 『효경(孝經)』 · 『곡례(曲禮)』 · 『이아(爾雅)』 · 『문선(文選)』 등으로 나타난다.

삼국시대 이후 불교가 융성하자 한문으로 이루어진 불교 문학도 발달하였다. 원효(元曉) · 원측(圓測) · 의상(義湘) 등이 불교의 교리를 논한 기(記)와 소(疏)는 문장 서술의 논리 조직이 뛰어나고, 경전을 풀이한 내용을 총괄하고 감회를 표현한 게송(偈頌)은 문학성을 지니고 있다. 혜초(慧超)『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기행문으로 오언시 형식의 서정시도 들어 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682년 국학(國學) 설치, 788년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설치로 한문학의 소양을 갖춘 문인 지식인들을 양성하고 발탁하는 제도를 확립하였다. 설총(薛聰)의 「화왕계(花王戒)」는 이 시기 한문 산문의 수준을 대표한다. 성덕왕(聖德王) 때에는 당(唐)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하여 통문박사(通文博士)를 두어 당나라에 보내는 국서(國書)를 관장하게 하는 등 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 시기에 김대문(金大問)『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花郞世紀)』『계림잡전(鷄林雜傳)』을 짓기도 하였다. 719년의 「감산사미륵조상기(甘山寺彌勒彫像記)」, 771년의 「성덕대왕신종명문(聖德大王神鐘銘文)」 등의 금석문도 세련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라말 경문왕은 낭혜(郞慧)와 『문심조룡(文心雕龍)』을 강독하고 스스로 「진경대사비문(眞鏡大師碑文)」을 짓는 등 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신라 말기의 한문학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 등 육두품 출신 문인 지식인들에 의하여 새로운 경지가 열렸다. 최치원은 주로 한시를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였지만, 공적이고 사적인 한문 산문에서도 유명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중국 당나라에서 지은 「격황소서(檄黃巢書)」나 귀국하여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이 모두 명문으로 꼽힌다. 최치원과 같은 주37 출신인 박인범(朴仁範)최승우(崔承祐)최언위(崔彦撝) 등은 신라 말기의 한문학을 대표하면서 신라 문학을 고려 문학으로 연결하였다.

신라와 남북국 관계에 있던 발해도 당나라 및 일본과 교유하면서 독자적인 한문학을 발달시켰다. 발해 문학의 자료는 이웃 나라 문헌에 일부가 전하고 금석문이 남아 있을 뿐이라서 그 전모를 알 수는 없지만, 일본에 보낸 국서나 주38」나 주39」와 같은 금석문, 그리고 양태사(楊泰師)‧ 왕효렴(王孝廉)‧인정(仁貞)‧정소(貞素)‧배정(裴珽) 등이 남긴 한시 작품들을 보면 발해 한문학의 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4.2 고려시대의 한문학

고려시대는 통일 직후 주40에 힘을 써 최언위 등 신라 육두품 출신 문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다. 광종(光宗)과거제]를 확립하면서 주41의 과목에 시부(詩賦)를 지정하였고, 성종(成宗)국자감을 설치하고 관료에 대해 시부의 제작을 부과하는 주42도 실시하였다. 이로써 한문학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고려 초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최승로(崔承老), 최충(崔沖), 최유선(崔惟善), 박인량(朴寅亮) 등이 있다. 박인량은 신라 이래의 설화를 모아 『수이전(殊異傳)』을 엮으면서 전기체 소설로 발전시켰다. 12세기 초에 이르러 고려의 한문학은 변려문 중심에서 고문(古文)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이 시기에 해동 제일의 고문가(古文家)라고 평가된 인물은 김황원(金黃元)이었으나, 그의 작품은 전하지 않는다. 예종(睿宗) 때는 군왕과 신하들이 시와 사(詞)를 창화하는 등 귀족 문학이 융성하였던 한편, 곽여(郭輿) · 이자현(李資玄) 등이 도가(道家)의 생활을 하면서 독특한 시 세계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평정된 이후 귀족 세력은 문벌 귀족의 기존 이익을 옹호하려는 개경파(開京派)와 하층민과의 유대를 통하여 자주 노선을 추구하려는 서경파(西京派)가 대립하였다. 개경파의 김부식(金富軾)은 변려문을 배격하고 고문을 연마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였고, 정지상(鄭知常)은 당시풍(唐詩風)의 한시를 이용하여 개인의 서정을 표출하였다. 김부식은 유학의 도리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대각국사비문(大覺國師碑文)」과 같은 불교 관련 문장을 여럿 짓기도 하였다.

무신란과 몽고란을 거치면서 문벌 주43의 사대의식‧형식주의가 배격되고, 농촌 현실을 문제 삼는 사실주의적 문학과 반침략의식과 자주의식을 담은 민족주의적 문학이 발흥하였다. 김극기(金克己)는 전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조국 강산에 대한 애정을 한시로 표현하였고, 오세재(吳世才) 등의 죽림고회(竹林高會)는 최씨 정권의 문인들과는 달리 독자적인 문학 활동을 추구하였다. 이규보(李奎報)는 최씨 정권의 문인으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나, 농민들의 현실에 깊이 공감하여 현실 비판의 농민시를 다수 남겼고, 대몽항쟁의식을 바탕으로 조국의 위대한 건국 사실을 소재로 한 장편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었다. 이후 그의 민족사에 대한 관심은 이승휴(李承休)의 「 제왕운기(帝王韻記)」 등 영사시(詠史詩) 제작과 국사의 편찬으로 계승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신유학(新儒學)을 수용한 신흥사대부들이 새로운 시대 정신을 한문학에 담았다. 그 첫 세대인 안향(安珦)백이정(白頤正)우탁(禹倬) 등은 풍속의 변혁을 과업으로 삼았고, 다음 세대인 최해(崔瀣)안축(安軸)이제현(李齊賢) 등은 시대의 고민을 자기화하여 한시와 한문 산문으로 표출하였다. 특히 이제현은 근체시나 고체시를 창작하여 서정을 표출하였고, 고문 문체를 활용하여 역사서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 뒤 이곡(李穀)이색(李穡)은 많은 제자를 길러내 문학 사상의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 내었고,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은 고려 말기의 한문학을 대표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고문 문체를 이용한 전장(傳狀)이나 비지(碑誌)와 같이 한 인물의 일생을 서술하는 형식과, 사물에의 관심을 담은 가전체(假傳體) 형식이 특히 발달하였다. 이규보의 「노극청전(盧克淸傳)」은 물욕을 지니지 않았던 하급 관원의 행적을 서술하여 탐욕스런 관원들을 비판하였으며, 이색(李穡)도 평범한 인물의 일생을 서술하여 현실 생활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 이곡의 「절부조씨전(節婦曺氏傳)」, 이숭인의 「배열부전(裵烈婦傳)」 등 절부전‧열부전은 수난기의 여성의 의지를 찬미하였다. 또한 이규보의 「백운거사전(白雲居士傳)」, 최해의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 등은 작가 자신의 전(傳)을 가공적인 인물에 가탁하여 서술한 탁전(托傳)이다. 그리고 임춘(林椿)「국순전(麴醇傳)」「공방전(孔方傳)」, 이규보의 「국선생전(麴先生傳)」「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 혜심(慧諶)「죽존자전(竹尊者傳)」「빙도자전(氷道者傳)」, 이곡의 「죽부인전(竹夫人傳)」, 식영암(息影庵)「정시자전(丁侍者傳)」, 이첨(李詹)「저생전(楮生傳)」 등 가전체 작품들은 술 · 돈 · 거북 · 대나무 · 지팡이 등을 소재로 삼아 사물의 쓰임새를 통하여 인간 운명을 비유하여 삶을 통찰한 가전체 작품들이다.

한편 무신란 이후로는 시화(詩話)의 형태로 비평 문학이 발달하여, 이인로(李仁老)『파한집(破閑集)』, 이규보의 『백운소설(白雲小說)』, 최자(崔滋)『보한집(補閑集)』 등으로 이어졌다. 비평 문학이 궤도에 오르면서 시문의 창작 방법, 작가와 작품과의 관련 문제, 수사법, 문학사를 중심 주제로 삼게 되었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고려 말기의 최해는 『동인지문(東人之文)』을 편찬하였고, 이제현은 『역옹패설(櫟翁稗說)』과 같은 시화를 편찬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불교 문학도 새로운 장을 열었다. 지눌(知訥)‧혜심(慧諶)‧천인(天因)‧천책(天頙)‧운묵(雲黙)‧충지(沖止)‧경한(景閑)‧보우(普愚)‧혜근(惠勤) 등의 주44은 선시(禪詩)와 어록(語錄) 등을 통하여 불교적 교리와 감정을 표현하였고, 문학에 대한 자각 위에 한시를 통하여 현실의 문제를 다루었다. 각훈(覺訓)은 승려들의 전기집인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을 편찬하였으며, 일연(一然)은 역사 의식과 불교 의식을 바탕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찬하였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문집의 실상을 살펴보면, 문집 본래의 체재와 내용을 온전히 갖춘 것으로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이곡의 『가정집(稼亭集)』, 이제현의 『익재집(益齋集)』 정도이고, 문집의 형태로 현재 전해오는 것들은 조선시대에 후손들에 의하여 수집 및 정리되어 단편적으로 구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 밖에 문집의 이름만 전할 뿐 여러 대에 걸친 전란으로 소실되거나 주45된 것들도 수십 종에 이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김극기의 『김거사집(金居士集)』과 이인로의 『쌍명재집(雙明齋集)』이다. 이와 같은 문집들의 서문이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어 그 체재와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는 호국 주46가 성행되던 시기였으므로 고승들의 문집 간행도 있었을 것이나, 현전하는 것은 의천(義天)『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과 같은 몇 종뿐이다.

4.3 조선시대의 한문학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들은 이미 고려 말기부터 정치‧경제 제도의 개혁을 주도하면서, 가례(家禮)의 준수, 사당(祠堂)의 건립을 확대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정책을 표방하였는데, 정도전(鄭道傳)「불씨잡변(佛氏雜辨)」, 「심문천답(心問天答)」 등 변론체(辯論體) 문장이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출현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경제문감(經濟文鑑)』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도모하였다. 권근(權近)「입학도설(入學圖說)」 등 변론체 문장으로 성리학의 이론을 밝혔으며, 응제시(應製詩)로 자주적인 민족 의식을 드러내었다. 변계량(卞季良)은 문형(文衡)을 잡아 외교 문서를 전담하고 관각문학(館閣文學)의 규범을 마련하였다. 관각문학이란 국내외 공식 문서를 전담하는 문인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실용적‧장식적 기능의 문학을 말하는데, 세종(世宗)에서 문종(文宗) 연간까지 집현전을 중심으로 발달하다가, 성종(成宗)조의 서거정(徐居正) 등 훈구(勳舊) 문신들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았다.

세종 때 간행된 『찬주분류두시(纂注分類杜詩)』 나, 성종 때 간행된 『고려사(高麗史)』『동국통감(東國通鑑)』‧『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경국대전(經國大典)』『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악학궤범(樂學軌範)』‧『동문선(東文選)』 등 한시 주석서, 역사서, 지리서, 법전, 예악 관계 서적, 시문학 총집은 집현전을 중심으로 축적된 연구 성과와 민족 문화에 대한 자각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업적들이다. 한문학의 모든 형식에 두루 통한 서거정은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과 같은 민간의 구비문학에도 능하였다. 뒤이어 성현(成俔)은 통치 질서를 옹호하는 훈구파(勳舊派)의 입장에서 보수적인 문학관을 논하는 논변류와 서발류의 문장을 많이 남겼고, 『용재총화(龍齋叢話)』를 지어 다양한 분야의 관심을 드러내는 한편 구비문학을 기록해 두었다.

중종(中宗)조에는 이른바 사림파(士林派) 문인들이 활약하기 시작함으로써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훈구파의 문학 활동이 위축되었다. 남곤(南滾)박상(朴祥)‧이행(李荇)‧박은(朴誾) 등이 활약하였다. 명종선조(宣祖) 조에는 관각삼걸(館閣三傑)인 정사룡(鄭士龍)노수신(盧守愼)황정욱(黃廷彧)이 관각문학의 명맥을 이어갔다.

성종‧중종조 이후 사림파는 형식적인 문학을 추구한 훈구파와는 달리, 도학과 문학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문학 이론을 내세웠다. 김종직(金宗直)『청구풍아(靑丘風雅)』『동문수(東文粹)』를 편찬하였고, 지리산 기행문을 지어 향토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었으며, 『조의제문(吊義帝文)』을 지어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을 풍자하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은 「득지락부(得至樂賦)」와 「수향기(睡鄕記)」에서 의식의 자유를 갈망하였고, 「귀신론(鬼神論)」‧ 「육신전(六臣傳)」 등으로 독특한 사상을 펼쳐 보였으며,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추강냉화(秋江冷話)』를 지어 김종직 일파의 행적을 전하였다. 김안국(金安國)『사재척언(思齋摭言)』을 엮어 백성들이 미신에 사로잡히는 것을 개탄하고 교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은 논변류의 문장을 통하여 도학 사상의 핵심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선조 조에 집권한 사림파 문인인 송순(宋純)임억령(林億齡)박순(朴淳)정철(鄭澈)김성일(金誠一) 등은 주로 한시 창작을 통하여 심성의 바른 소리를 표출하는데 주력하였다.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정치 질서 속에 편입되기를 거부한 주47의 삶을 산 김시습(金時習)은 한시를 통하여 자신의 내면 갈등과 현실 인식을 드러내는 한편, 논변류의 문장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전기체 창작 소설 모음집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엮어 귀신, 주48, 용왕, 용궁 같은 비현실적인 소재를 이용하여 현실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비현실적인 소재를 이용함으로써 현실적인 것의 의미를 생생하게 드러내었다. 도가적 삶을 산 홍유손(洪裕孫)정희량(鄭希亮)정렴(鄭𥖝), 거리낌 없이 현실을 비판한 어무적(魚無迹),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수성지(愁城誌)」의 작가인 임제(林悌) 등이 모두 한시와 한문 산문을 통하여 체제에 대한 불만과 내면의 고독을 짙게 드러내었다. 한편 천인 출신으로 문명이 높았던 서기(徐起)송익필(宋翼弼)유희경(劉希慶)백대붕(白大鵬) 등과 삼당파(三唐派)의 백광훈(白光勳)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 등도 순수하고 독자적인 미적 세계를 모색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한문학은 민족 수난에 대응한 기록 문학을 많이 생산하였다. 유성룡(柳成龍)『징비록(懲毖錄)』, 이순신(李舜臣)『난중일기(亂中日記)』 등은 임진왜란의 경과와 통치 체제의 붕괴 모습, 의병과 관군의 투쟁, 개인의 고충 등을 세밀하게 표출하였다. 민순지(閔順之)는 관련 야사를 총괄하여 「임진록(壬辰錄)」를 지었다. 전란 뒤에는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과 같이 공을 세운 이들의 주49가 다수 만들어졌다. 왜군의 포로가 되었던 강항(姜沆)은 3년 동안의 일본 체험기를 『건차록(巾車錄)』으로 엮었다. 그 밖에도 많은 기록 문학 작품들이 있었으니, 병자호란을 거친 뒤에는 『병자록(丙子錄)』,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 『병자일기(丙子日記)』 등의 기록 문학이 나왔고, 김창협(金昌協)「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과 같이 후대인의 기록 문학도 이루어졌다. 최명길(崔鳴吉)의 「병자봉사(丙子封事)」는 병자호란 때의 대표적인 주소류 문장이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전란 후에는 전쟁의 현실을 반영한 한문 소설이 출현하였다. 「달천몽유록(㺚川夢遊錄)」, 「 피생명몽록(皮生冥夢錄)」, 「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 등 몽류록계 소설들은 하급 군사, 일반 백성, 여인들의 원망을 담았다. 또한 조위한(趙緯韓)「최척전(崔陟傳)」은 전란으로 인해 기구한 운명을 겪은 부부의 이야기를 소설화하였다.

두 전란 이후 유몽인(柳夢寅)‧ 이수광(李睟光)권필(權韠)‧허균(許筠) 등 문인 지식인들은 정통 한문학의 관습과는 다른 문학 세계를 열었다. 유몽인은 구전의 사실과 중국 소화집의 이야기를 토대로 야담집 『어우야담(於于野談)』을 엮었고, 이수광은 해박한 지식과 비판 정신을 담은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저술하였으며, 권필은 인습에 저항하는 정신을 시로 드러내었다. 허균은 논변류의 문체로 혁신 사상을 논술하고 『학산초담(鶴山樵談)』『성수시화(惺叟詩話)』와 같은 시화와 『국조시산(國朝詩刪)』이라는 시선집을 편찬하였다. 또한 권필은 「주생전(周生傳)」을, 허균은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등 다섯 편의 전을 지어 소설을 창작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서인(西人) 문벌의 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이식(李植) 등 이른바 한문 4대가는 문형을 맡으면서 문학을 진흥하는 한편, 각기 발랄한 사유와 문학 정신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공용 문서 제작을 전담한 문장가인 최립(崔岦)이 공용문의 형식미를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의고문체(擬古文體)를 시도한 것과는 달리, 도학을 내용으로 삼는 고문을 제작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양명학이나 도가적 사유를 받아들여 문학 세계를 확장하였다. 장유는 작가의 개성을 중시하는 천기론(天機論)을 주장하였다. 신흠은 『청창연담(晴窓軟談)』‧『구정록(求正錄)』‧『야언(野言)』‧『잡록(雜錄)』을, 장유는 『계곡만필(溪谷漫筆)』을, 이식은 『서후산록(敍後雜錄)』을 각각 저술하여 기존의 사유 체계나 문학론과는 다른 방향을 모색하였다.

숙종(肅宗) 조에는 남용익(南龍翼)김석주(金錫冑)가 관각 문학을 정비하였다. 남용익은 『호곡시화(壺谷詩話)』『기아(箕雅)』를 편찬하였고, 김석주는 고문의 모범으로 『사기(史記)』의 문장을 내세워 『사기발췌(史記拔萃)』를 간행하고 사부의 가치를 재인식하여 『해동사부(海東辭賦)』를 편찬하였다.

17세기 후반에는 남인허목(許穆)노론송시열(宋時烈)이 사상의 근거에 관하여 논란을 벌이는 등 학술 · 사상계가 활기를 띰에 따라 논지 전개를 중시하는 논변류, 서독류의 명문과 주목할 만한 잡저가 많이 나왔다. 김만중『서포만필(西浦漫筆)』, 윤휴(尹攜)의 『독서기(讀書記)』, 박세당(朴世堂)『사변록(思辨錄)』 등이 있고, 양명학자인 정제두(鄭齊斗)는 잡설류의 문장인 「잡저(雜著)」에서 이기설을 이용하면서도 마음을 근본으로 보는 양명학적 사유를 피력하였다. 또한 김창협(金昌協)도 『농암잡지(農巖雜識)』와 같은 잡저를 남겼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집권 계층에 속하지 않는 문인 지식인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신유한(申維翰)주50으로 일본에 갔다가 온 일을 『해유록(海遊錄)』으로 엮었고, 이광정(李光庭)은 우언 형태로 세상을 풍자한 이야기를 「망양록(亡羊錄)」으로 엮었다. 소론계 기술 관료였던 홍양호(洪養浩)「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을 지어 무(武)의 가치를 재평가하였다. 이광사(李匡師)는 서법(書法) 이론을 『서결(書訣)』로 전개하였고, 신광수(申光洙)는 평안도의 풍속 기사시인 「관서악부(關西樂府)」를 남겼다. 신위(申緯)는 다양한 문학 사조를 두루 익혀 조선시대 한시의 침체성과 편향성을 극복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서울의 기술직 중인(中人)과 서리층, 그리고 주51의 문학 활동이 두드러져, 이들 여항인(閭巷人)의 시선집이 독자적으로 편찬되었다. 홍세태(洪世泰)는 한문 산문에서도 하녀의 죽음을 애도한 「제금비묘문(祭琴婢墓文)」, 자신의 방황을 경계한 「자경문(自警文)」, 같은 중인의 삶을 서술한 「유술부전(庾述夫傳)」 등 명문을 남겼다. 그 뒤 정래교(鄭來僑)는 「항재기(恒齋記)」‧「낙여재기(樂與齋記)」에서 형식주의적 문학을 비판하고, 당시의 예술가에 관한 「김성기전(金聖基傳)」‧「화사김명국전(畵師金鳴國傳)」, 주52에 관한 「임준원전(林俊元傳)」, 의원에 관한 「백태의전(白太醫傳)」과 같은 전기 작품들을 지었다. 조수삼(趙秀三)은 시정인들의 형상을 「동리선생전(東里先生傳)」‧「이단전전(李亶佃傳)」 등에서 그려내었으며, 항간의 설화와 7언절구시를 결합시켜 「기이(紀異)」를 연작하여 시정인의 삶을 묘사하였다. 19세기 중엽의 변종운(卞鐘運)과 장지완(張之琬)은 예교주의적 군자 풍격을 추구해서, 전의 양식이나 묘지명의 양식의 작품으로 이상적 인물 형상을 그려내었다. 한편 조희룡(趙熙龍)은 『호산외기(壺山外記)』를, 유재건(劉在建)은 『겸산필기(兼山筆記)』를 각각 지어 중인층의 인물들의 행적을 서술하였다. 유재건은 중인층의 시선집인 『풍요삼선(風謠三選)』과 중인층 시를 중심으로 한 『고금영물근체시(古今詠物近體詩)』를 편찬하였으며, 중인층의 일화집을 집대성한 『이향견문록(異鄕見聞錄)』을 별도로 편집하였다.

조선 후기 한문학에 있어서 진보적인 사유 방식을 표출한 문인 지식인들은 홍대용(洪大溶)‧박지원(朴趾源)‧ 이덕무(李德懋) 계열, 이익(李瀷)이용휴(李用休) 계열, 정약용(丁若鏞)이학규(李學逵) 계열, 이광사(李匡師)‧ 이긍익(李肯翊) 계열이다. 이들은 모두 백과사전식 잡저류와 역사서, 지리서를 저술하여 폭넓은 현실 인식과 자주적 역사 의식을 드러내었다. 잡저류로는 유형원(柳馨遠)『반계수록(磻溪隨錄)』,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안정복의 『순암잡록(順庵雜錄)』‧ 『잡동산이(雜同散異)』, 홍대용의 『담헌서(湛軒書)』,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이학규의 『동사일지(東史日知)』, 이규경(李圭景)『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 등이 대표적이다. 역사서‧지리서로는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유득공(柳得恭)『발해고(渤海考)』, 이중환(李重煥)『택리지(擇里志)』 등이 대표작이다. 또한 정약용과 유희(柳僖) 등은 우리 언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어석집(語釋集)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이후 진보적 문인 지식인들은 한시와 한문 산문, 그리고 비평 문학에서도 혁신적인 사상을 도모하였다. 이익은 「해동악부」를 지어 선비의 비판적 구실을 강조하고 우언시(寓言詩)를 통하여 벌열층의 정권욕을 비판하였다. 안정복은 몇몇 악부체 주53에서 역사의 전환기에 주체적인 삶을 산 인물을 부각시켰다. 이용휴와 그 아들 이가환(李家煥)주54 한시와 한문 산문을 남겼다. 홍대용과 박지원은 각각 『담헌연기(湛軒燕記)』와 『열하일기』에서 과학적‧분석적 사고와 민족적 의식을 담았다. 특히 박지원은 참신한 문체를 개발하여 연암체(燕巖體)를 확립하였으며, 고법의 준수와 창의성을 동시에 겸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 문학 이론을 개진하였다. 『열하일기』는 잡저류나 견문기의 성격을 넘어서서, 복합적인 조직과 심각한 주제를 담은 산문집으로, 「허생전(許生傳)」과 같이 독립된 소설의 성격을 지닌 서사물도 포괄하고 있다. 한편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이서구(李書九) 등 사가(四家)는 한시의 기풍을 쇄신하였다. 이옥(李鈺)은 일상생활에서 겪은 경험과 섬세한 감정을 소품(小品)에 담아내었다. 정약용과 이학규는 현실에 대한 묘사와 풍자를 여러 한시 형식을 통하여 시도하였다. 김정희(金正喜)는 한시 창작에서 개성의 가치를 존중하는 성령론(性靈論)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구전 설화를 야담으로 정리하면서 소설적 구성을 갖춘 한문 단편들이 등장하고, 현실 세태를 사실적으로 반영하였다. 박지원의 9편의 전(傳) 작품들도 야담을 기반으로 한 한문 단편이라고 할 수 있고, 김려(金鑢)이옥(李鈺)도 예술성이 높고 주제 사상이 탁월한 한문 단편을 창작하였다. 이옥은 한문으로 된 유일한 희곡인 「동상기(東廂記)」의 작가이기도 하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동선기(洞仙記)」「유록전(柳綠傳)」「영영전(英英傳)」「운영전(雲英傳)」 등 애정 소설과 「서옥기(鼠獄記)」와 같은 우화소설이 나와, 예술성과 미학성이 높은 국문 소설과 병존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노론의 홍석주(洪奭周)김매순(金邁淳), 주55을 주장한 산림의 거두 이항로(李恒老), 남인의 허전(許傳), 소론의 정원용(鄭元容)이유원(李裕元) 등이 한문학의 정통성을 확인하면서 대가의 풍모를 보였다. 한편 개화사상가 박규수(朴珪壽)는 왕조의 내부 문제를 혁신할 것을 주장하면서, 「풍소여향(風韶餘響)」」에서 조선 왕조의 영속적 번영을 구가하였다.

구한말에는 여항시(閭巷詩)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강위(姜瑋), 양명학의 가학을 이은 이건창(李建昌), 우국의 충정을 지녔던 황현(黃玹), 위정척사와 의병 투쟁을 전개한 최익현(崔益鉉), 한문학의 유산을 정리한 김택영(金澤榮) 등이 한문학의 대표적 인물이다. 1917년에 최영년(崔永年)정만조(鄭萬朝)여규형(呂圭亨) 등은 『조선문예(朝鮮文藝)』를 간행하고 한문학 부흥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도 하였다.

5. 한문학 연구의 성과와 과제

한문학 가운데 한시, 한문 산문, 한문 소설 연구의 성과와 과제, 그리고 향후의 한문학 연구의 과제는 다음과 같다.

한시 연구는 1980년대 한시 문학사 전체를 포괄한 통시적 연구가 시작된 이후로 한시 문학사의 각도에서 사적 구도를 비롯하여, 시풍 · 작가를 다룬 연구 성과들이 현재까지 제출되고 있다. 다만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들은 한시 문학사의 각도를 바탕으로 삼기는 했으나, 역사적 구도를 거시적으로 보여 주려는 시도보다는 대체로 작가론에 집중한 경향이 짙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보완하면서 한시 연구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지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56 연구가 더욱 활발해야 한다. 단대사는 각 시대의 사조와 시풍,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여 한시 문학사의 다양한 현상을 더 깊이 세밀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다. 단대사도 한문 문학사로 볼 때와 한시 문학사로 볼 때 시각이 다를 수 있으므로, 한시 문학사에 집중하여 저술하는 선택도 유효하다. 중국 시사를 연구할 때 당시사(唐詩史) · 송시사(宋詩史) · 명시사(明詩史) · 청시사(淸詩史)를 쓰듯이, 한시 연구 학계에서도 특정한 시기에 집중하여 저술이 이루어진다면, 그 바탕 위에서 전체 한시 문학사와 한문 문학사가 한층 더 체계적으로 서술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한시 문학사에서 주목하는 작가와 작품을 더 풍부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전통적 견해의 적극적 조사와 선택적 수용, 현대적 연구의 충분한 채택, 한시 사가(史家)의 개성적 안목의 발휘라는 세 가지 차원의 접근이 요구된다. 1980년대 이전에는 전체를 꿰뚫는 대가의 안목에 기대어 저술하였다면, 본격적으로 한문학을 연구한 80년대 이후에는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운 방대하고 다양한 성과들을 충실하게 반영하여 이전 시기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한시사가 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을 활용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한 수준 높은 한시 문학사가 등장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 여기에는 물론 주요한 작가와 작품을 깊고 넓게 읽고 역사적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이 전제가 된다.

셋째, 단조로운 작가론을 지양하여 역사적 맥락을 잡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역사적 비중이 큰 작가나 작품을 한시 문학사 서술의 중심에 놓을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저명한 작가의 생애와 일화, 작품의 특징이나 비평을 열거한다고 해서 좋은 한시 문학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론의 연장선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서술을 지양하고 시사(詩史) 변화의 과정을 해명하는 문제에 집중하도록 노력하는 한편, 그동안 무시되었던 시기나 작가를 찾아내 그들의 위상에 알맞게 그 가치를 부여하도록 해야 한다. 특히 시단(詩壇)의 흐름을 이끄는 시파(詩派)나 시사(詩社)의 존재를 발굴하고 그들에 관한 서술의 비중을 높이는 방향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한문 산문 연구는 한시 연구와 마찬가지로 한문 산문 문학사 전체를 포괄한 통시적 연구가 시작된 이후로 박지원 산문에 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다가, 이후 고문의 전개, 산문 비평 이론, 주57, 주58, 문체 비평, 문체 반정 등등에 관한 연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한문 산문은 정점의 경국(經國) 기능, 생활 세계의 담론 기능, 개인 내면의 표현 기능 등 다양한 기능을 지녔다. 경국 문장은 이념보다는 수사(修辭)를 중시하고, 생활 세계의 담론은 당벌(黨伐)의 시기에 이념 제시의 책략을 중시하며, 개인 내면의 표현은 자반(自反)의 원리를 중시했다. 한편 한문 산문은 전통적인 예술 세계 속에서 다른 장르‧양식과 주제 및 기법상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독자적 미학을 발달시켰고, 하위 문체들은 끊임없이 혼종을 만들어 내었다.

이렇게 다양한 층위에서 여러 가지 기능을 했던 한문 산문을 연구할 때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첫째, 한문 산문 범주의 확대이다. 한문 산문은 한문을 사용하여 한국 민족의 사상 감정을 표현한 문학, 역사 사실의 기록, 학문적 사색의 논술, 사대교린의 외교 관계나 공적, 사적 생활에서 작성한 문건을 모두 포괄한다. 한문 산문은 역사 발전을 고려하여 실용문과 공용문도 포괄시켜 광범한 의미로 규정해야 할 것이다. 또 한문을 주로 사용하되 한국어 어법을 적용하면서 이두를 붙인 표기법을 사용한 표기 체계의 글, 한자를 음차(音借)와 차자(借字)의 방식으로 활용한 글도 한문 산문의 범주에서 다루어야 한다. 이두식 한문과 차자 표기의 글도 정통 한문 표기 체계를 사용한 작품들과 서로 보완하거나 길항하면서 우리 민족 문학의 일부를 이루어왔기 때문이다.

둘째, 한문 산문의 정치 · 사회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한문 산문은 중국 문화의 비판적 수용과 정치 구조 속의 활용이라는 문화적‧정치적 요청에 의해 존립했다. 특히 고려시대 중엽 이후로는 과거 제도가 실시되어 문인 지식인들은 대개 관료로서 자신의 정치 이념을 실천하여, 한문 산문도 경세의 이념을 중시하게 되고 정치적 기능을 우선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과거 제도는 한문학 담당층의 공급 기제이면서 한문학 발달의 질곡이기도 했다. 두 시대의 문인 지식인들은 대부분 정치를 담당하거나 정치와 깊은 관련을 가져 공적 산문을 짓는 일이 많았으며, 사적 산문에도 정치적 색채를 농후하게 드러냈다.

셋째, 한문 산문의 역사 · 문화적 배경과의 관련성을 고려해야 한다. 한문 산문을 통해 행적을 기록하고 삶을 평가하는 관습은 삼국시대 ·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행장 · 전기 · 묘도 주59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러한 산문의 제작은 망자(亡者)를 예우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주60의 유지, 학맥의 확인, 공적 대우의 요청 등 역사 · 문화적 배경과 관련이 있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 대대로 고위 관직을 배출한 집안을 존중하고 특정 정치적 관점에 따라 인재를 다양하게 포섭하려는 공적 기획과 관련해서 인물록(人物錄)이 편찬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17세기 말부터 당론의 향배를 추적한 주61 저술들이 발달하고, 인물록과 기문록(記聞錄)을 집성하는 작업이 다각도로 수행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문 소설 연구는 한문학 분야에서의 위치가 애매한데, 당(唐)나라에 유가(儒家) 문인 지식인들이 창작한 전기(傳奇)를 볼 때 한시와 한문 산문을 교직한 중요한 글쓰기였다. 따라서 한문학의 차원에서 한문 소설 문학사는 작자층과 이들의 세계관의 흐름 및 변화를 고려한 속에서 구성되어야 한다. 이런 전제에서 한국 한문 소설사의 논의는 나말여초의 전기 작품인 「최치원(崔致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듯하다. 이후의 흐름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전중기에는 전기(傳奇)와 몽유록(夢遊錄)이 공존하면서 사대부 계층의 자의식을 고양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17세기로 접어들며 큰 분기가 일어나는데, 전반기의 전기 소설과 후반기의 국문 장편 소설로 대별된다. 비록 한문과 국문이라는 표기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모두 당대 지식인 집단의 첨예한 이해 관계가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이후 야담(野談)은 조선 후기 한문 단편 소설로 기능하며 국문 소설과 이원 구도를 형성하였다. 마지막 19세기 세태 소설은 시대의 변화와 작자층의 하향화를 통해 다기한 양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신라시대 이후 정통 한문학을 창작하는 문인 지식인들에 의해 생산된 한문 소설은, 작품이 지향하고 담아낸 사상이나 주제가 유가 사회와는 배치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문집에도 수록되지 않고 심지어는 창작한 주체들과 그 주변에서마저도 쉬쉬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이렇기 때문에 더욱 한문학의 주62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문집에 들어올 수 없는 글쓰기로 그것이 불편한 대상이라면, 이것이 환기하고 있는 점이 있는 것이다. 창작 주체의 이면을 심층적으로 살펴보기에 용이하고, 나아가 한문학의 시야를 재고하는 데 환기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한문학 연구는 그것이 작가론이든 작품론이든 한시와 한문 산문, 그리고 한문 소설을 같은 재료로 올려놓고 균형감을 잡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향후의 한문학 연구의 과제는 문화론적 진행 방향에 대한 가능성과 고려이다. 한문학 자료는 다종다양한 정보의 저장고이다. 이 땅의 시공간에서 인간이 살아온 모습과 활동, 자연‧제도‧사회에 대응한 정신과 의지가 미래의 한국인과 외부의 세계인에게도 반향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은 충분하다. 예컨대 국가 폭력의 작동 방식과 열녀의 탄생, 남성 주도에 의한 여성 문인 만들기 등을 밝힌 기존의 연구는 여성에 대한 문화론적 차원의 연구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특정한 문화의 공간과 활동, 지역인과 소수자, 문제적‧매력적 인간형, 자기 성찰과 응시, 딜레마 또는 절명의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 등은 누구나가 관심을 가질 만한 보편적 주제일 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을 넘어 다양한 자료를 활용할 수 있다. 이는 소재의 발굴과 주제의 발견이 연구자의 능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해 준다. 한문학에 대한 연구자가 자신의 시야를 넓히면, 음식 · 도박 · 기호 · 열광 · 눈물 · 여행 · 주거 등의 미시적이고 생활사적인 제재들을 비롯하여, 지식 · 출판 · 개념의 역사와 전이를 추적하는 다분히 학구적이고 거시적인 주제까지가 문화론적 범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문학 작품이 그 자체로 존립 가능한 심미적 구조물이긴 하지만, 문학이 인간과 그를 둘러싼 사회를 해석하는 데 긴요한 매개가 될 수 있다. 한문학을 통한 문화론적 탐구 경로를 선택할 경우에는 문학 자료와 문학성에 얽매이기보다, 고문헌 · 국문 자료 · 현대 자료를 포괄하는 자료적 경계 확장을 통해 궁극적으로 포착하고 싶은 목표점, 곧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해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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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호, 『한국 한시의 이해』 (태학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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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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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무영, 「21세기 한국한문학사 서술의 여러 문제-여성문학사의 입장에서-」 (『한국한문학연구』 64, 한국한문학회, 2016)
심경호, 「글로벌시대 한문학 연구의 새로운 방향」 (『대동한문학』 49, 대동한문학회, 2009)
심경호, 「한문산문사 서술의 제문제」 (『한국한문학연구』 64, 한국한문학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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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택, 「한국한문학사 서설」 (『한국한문학연구』 64, 한국한문학회, 2016)
정환국, 「한문소설사 서술의 제문제」 (『한국한문학연구』 64, 한국한문학회, 2016)
주석
주1

한자와 관련된 공통된 특징을 보이는 어떤 문화가 지리적으로 분포하는 범위. 우리말샘

주2

문학, 역사, 철학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3

한나라 시대. 우리말샘

주4

악가(樂歌)와 속요(俗謠)를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5

‘구비 문학’의 북한어. 우리말샘

주6

중국 양(梁)나라의 유협이 쓴 남북조 시대의 문학 평론서. 조직적 문학 평론서로는 중국 최초의 것으로 전반 25편에는 문학의 근본 원리를 논술하고 각 문체에 관한 문체론을 폈으며, 후반 25편에는 문장 작법과 창작론에 관하여 논술하였다. 10권 50편. 우리말샘

주7

고대 논설문을 통틀어 이르는 말. 논, 설, 변, 해, 박(駁), 고(考), 원(原), 평(評) 따위의 하위 갈래가 있다. 우리말샘

주8

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 또는 그 글. 주로 간관(諫官)이나 삼관(三館)의 관원이 임금에게 정사(政事)를 간하기 위하여 올렸다. 우리말샘

주9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0

고체시(古體詩).

주11

금체시(今體詩).

주12

평측이나 자수에 제한이 없어 비교적 자유로운 형식의 한시. 근체시와 상대되며, 사언ㆍ오언ㆍ칠언ㆍ잡언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13

한 수의 시 속에 삼언, 오언, 칠언 따위의 구를 섞어 쓰는 한시체. 우리말샘

주14

중국 육조 이전의 오언(五言) 악부에 대하여, 당나라 중기에 시작된 칠언 가시(七言歌詩)의 새로운 악부. 특히 백거이가 주장한, 백성의 희로(喜怒)를 노래하고 당나라의 폐단을 풍자한 악부를 이른다. 우리말샘

주15

자연과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사물을 대상으로 하여 정확하고 세밀하게 묘사한 시 가운데 하나. 주로 한시가 많으며, 영물시에 관한 대표적인 작가로는 이색, 이규보, 이학규 등이 있다. 우리말샘

주16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제재로 한 시. 객관적으로 서술하기도 하고 주관적인 회고(懷古)로 그리기도 한다. 이승휴의 ≪제왕운기≫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17

시가에서, 시행의 일정한 자리에 같은 운을 규칙적으로 다는 일. 또는 그 운. 우리말샘

주18

평자(平字)와 측자(仄字)라는 뜻으로, 한문의 시ㆍ부 따위에서 음운의 높낮이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9

전례(典例)와 고사(故事)를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20

문장의 운율(韻律). 유협의 ≪문심조룡≫에서 창작론(創作論)에 해당하는 제33장의 제목이다. 유협은 이러한 운율의 발생은 생리 현상과 맞물려 있다고 보았으며, 음악뿐 아니라 문학의 문장에도 음률(音律)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우리말샘

주21

중국 청나라 때의 학자ㆍ문장가(1731~1815). 자는 희전(姬傳). 당호(堂號)를 따서 석포(惜抱) 선생으로 불렸다. 1763년 진사가 되어 관직은 형부 낭중에 이르렀고, 동성파의 인물로 고증학에 반대하고 주자학을 옹호하였다. 저서로는 ≪고문사류찬(古文辭類纂)≫이 있다. 우리말샘

주22

천자(天子)의 명령. 우리말샘

주23

한시(漢詩)를 지을 때 일정한 자리에 운자를 넣는 방법. 보통 각운을 한다. 우리말샘

주24

둘 이상을 한데 아울러서 칭함. 우리말샘

주25

사물을 의인화하여 전기(傳記) 형식으로 서술하는 문학 양식. 고려 중기 이후에 성행하였으며, 임춘(林椿)의 <국순전>, <공방전>이나 이규보(李奎報)의 <국선생전#GT#따위가 여기에 속한다. 우리말샘

주26

우리나라의 고전 소설로, 고구려 평원왕 때의 장군이자 평강 공주와 혼인하여 무장이 된 온달에 관한 전기. 어려서는 바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평강 공주와 혼인하고 훌륭한 무장이 되어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삼국사기≫ 권45 열전(列傳)에 실린 전기이다. 우리말샘

주27

인격화한 동식물이나 기타 사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와 교훈의 뜻을 나타내는 이야기. ≪이솝 이야기≫ 따위가 여기에 속한다. 우리말샘

주28

신라 신문왕 때 설총이 꽃을 의인화하여 지은 우언적(寓言的)인 한문 단편. 꽃의 왕 모란이 아첨하는 미인 장미와 충간을 하는 백두옹 사이에서 누구를 택할 것인가 주저하는 것을 보고 백두옹이 왕을 질책하였다는 내용이다. ≪삼국사기≫ <설총전(薛聰傳)>에 실려 있으며, ≪동문선≫에는 <풍왕서(諷王書)>라는 제목으로 전한다. 우리말샘

주29

자기 나라의 말을 적는 데 남의 나라 글자를 빌려 씀. 또는 그 글자. 우리말샘

주30

충청북도 충주시 감노로에 있는, 삼국 시대 고구려의 비석(碑石).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순수비(南進巡狩碑)로, 화강암으로 된 비석의 사면에 예서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국보 정식 명칭은 ‘충주 고구려비’이다. 우리말샘

주31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성재산에 있는 비. 신라 진흥왕 때에 건립되었다. 우리나라 국보이다. 우리말샘

주32

신라 진흥왕이 지금의 한강 유역에서 동북 해안에 이르는 지대와 가야를 쳐서 영토를 넓힌 다음, 신하들과 변경(邊境)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닐 때에 세운 기념비. 현재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창녕비의 넷이 남아 있다. 우리말샘

주33

백제 의자왕 때 사택지적이 남긴 비. 1948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존하는 것은 앞부분에 해당하는 56자이다. 우리말샘

주34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이 지은 한시. 중국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지어 보낸 것으로, 현전 최고(最古)의 한시이다. 우리말샘

주35

신라 때에, 진덕 여왕이 당나라 고종에게 보낸 송시(頌詩). 당나라의 홍업(鴻業)을 크게 칭송ㆍ찬양한 것으로, 신라가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를 공격하려고 당나라의 힘을 얻기 위하여 보낸 것이다. 우리말샘

주36

비석에 새긴 글. 우리말샘

주37

중국 당나라 때에, 외국인에게 보게 하던 과거(科擧). 신라의 최치원 등이 급제하였다. 우리말샘

주38

중국 지린성(吉林省) 둔화현(敦化縣)에 있는 발해 정혜 공주의 무덤 안에서 발견된 묘비. 높이 90cm, 너비 40cm, 두께 20cm이다. 출토 시에 이 비가 일곱 조각으로 파괴되어 있었는데, 복원 결과 모두 21행 725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말샘

주39

중국 지린성(吉林省) 허룽시(和龍市) 룽수이향(龍水鄕) 룽하이촌(龍海村) 서쪽의 용두산(龍頭山)에 있는 발해 문왕(文王)의 넷째 딸 정효 공주의 무덤에서 발견된 묘비. 높이 105cm, 너비 58cm, 두께 26cm이다. 모두 728자가 18행에 걸쳐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우리말샘

주40

학문과 법령으로 세상을 다스림. 또는 그런 정치. 우리말샘

주41

고려 시대에, 과거에서 시(詩), 부(賦), 송(頌), 책(策) 따위의 한문학으로써 시취(試取)하던 과목. 문신을 등용하기 위한 시험으로, 합격자를 진사라고 불렀다. 우리말샘

주42

고려 시대에, 문신으로 하여금 매달 시부(詩賦)를 짓게 하던 제도. 문신들이 공무에 쫓겨 본업에 소홀한 것을 경계하여, 고려 성종 14년(995)에 제정되었다. 우리말샘

주43

대대로 특정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를 가진 귀족. 우리말샘

주44

선종의 승려. 우리말샘

주45

자취도 없이 모두 없어짐. 또는 그렇게 없앰. 우리말샘

주46

나라가 외침을 당하였을 때에 나라를 구하고 지키는 지도 원리로서의 불교. 우리말샘

주47

일이 벌어진 테두리에서 벗어나 그 일에 관계가 없는 사람. 우리말샘

주48

저승에서,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지은 생전의 선악을 심판하는 왕. 지옥에 살며 십팔 장관(十八將官)과 팔만 옥졸을 거느리고 저승을 다스린다. 불상(佛像)과 비슷하고 왼손에 사람의 머리를 붙인 깃발을 들고 물소를 탄 모습이었으나, 뒤에 중국 옷을 입고 노기를 띤 모습으로 바뀌었다. 우리말샘

주49

예로부터 전하여 오는 사적(事跡). 우리말샘

주50

조선 시대에, 승문원에 속한 벼슬. 우리말샘

주51

서자(庶子)의 계통. 우리말샘

주52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는 사람. 우리말샘

주53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제재로 한 시. 객관적으로 서술하기도 하고 주관적인 회고(懷古)로 그리기도 한다. 이승휴의 ≪제왕운기≫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54

착상 따위가 아주 독특하고 뛰어나다. 우리말샘

주55

구한말에, 주자학을 지키고 가톨릭을 물리치기 위하여 내세운 주장. 본디 정학(正學)과 정도(正道)를 지키고 사학(邪學)과 이단(異端)을 물리치자는 것으로, 외국과의 통상 반대 운동으로 이어졌다. 우리말샘

주56

한 왕조에 한정하여 쓴 역사. 우리말샘

주57

어떤 형식을 갖추지 아니하고 자유로운 필치로 일상생활에서 보고 느낀 것을 간단하게 적은 글. 우리말샘

주58

옛 문장을 본떠 지은 글. 우리말샘

주59

묘갈, 묘비, 묘지 및 묘표 따위에 새겨 넣은 글자. 우리말샘

주60

대대로 내려오는 그 집안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우리말샘

주61

개인이 편찬함. 또는 그 편찬물. 우리말샘

주62

사회 구성원 간의 합리적 토론을 통하여 사회 구성원의 보편적 이익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담론적 공간. 독일의 사회 철학자 하버마스(Habermas, J.)가 구체화한 개념으로서, 공론에 근접하는 어떤 것이 형성될 수 있는 사회적 삶의 영역을 의미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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