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훈의 본관은 해미이며, 자는 창경, 호는 옥봉이다. 아버지는 백세인(白世仁)이며, 어머니는 광산김씨 첨정 김광통(金廣通)의 딸이다. 형 백광안(白光顔)과 백광홍(白光弘) 및 종제 백광성(白光城) 등 한 집안 4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칭송을 받았다.
백광훈은 박순(朴淳)의 문인으로 13세 되던 해인 1549년(명종 4)에 상경하여 양응정(梁應鼎)과 노수신(盧守愼) 등에게서 수학하였다.
1564년(명종 19)에 진사가 되었으나 현실에 나설 뜻을 버리고 강호(江湖)에서 시와 서도(書道)를 즐겼다. 1572년(선조 5)에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白衣)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시재(詩才)와 서필(書筆)로써 사신을 감탄하게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의 칭호를 얻었다.
1577년(선조 10)에 처음으로 선릉참봉(宣陵參奉)으로 관직에 나서고, 이어 정릉(靖陵) · 예빈시(禮賓寺) · 소격서(昭格署)의 참봉을 지냈다.
송시(宋詩)의 풍조를 버리고 당시(唐詩)를 따르며 시풍을 혁신하였기에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손곡(蓀谷) 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리었다.
조선 중기 송시이냐 당시이냐 하는 시비는 아주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삼당시인들은 송시가 자연스런 감동에서 멀어지고 인정이나 세태의 절실한 경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을 지적하고, 이러한 시풍의 방향 전환을 위해서 당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백광훈은 한국 한시사의 분기점을 이룩했다는 평을 받는다. 당풍(唐風)의 시를 쓰려고 노력하였고, 풍류성색(風流聲色)을 중시하여 자못 낭만적이고 염일(艶逸)한 시풍을 표현해 내었다. 이정구(李廷龜)는 그의 문집 서(序)에서 백광훈은 호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특히 오언절구(五言絶句)에 뛰어나고 율시와 절구에서 간결하고 고담(枯淡)한 기풍이 있어서, 중국의 이하(李賀)에 비유할만하며 그의 시는 천기(天機)로 이루어진 것이라 평하였다. 또한 그의 고시에서는 작자의 경험에서 우러난 사실적인 묘사와 본유적인 정감의 세계가 잘 드러난다. 절구는 「 홍경사(弘慶寺)」가 대표적이고, 고시로는 「 용강사(龍江詞)」와 「 달량행(達梁行)」 등이 주목할 만하다.
삼당시인 가운데 남은 작품 수가 가장 많으며, 제일 먼저 시집이 출간되어 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16세기 문학을 주도하였다고 평가된다. 그는 우리말의 다양한 어조와 어감, 어기, 어투 그리고 다양한 문맥적 변주의 시상으로 한시 작품을 완성하고자 노력한 시인이었다.
백광훈은 이산해(李山海), 최립(崔岦) 등과 더불어 팔문장의 칭호를 받았고,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으며, 특히 영화체(永和體)에 빼어났다. 별세한 뒤 1590년(선조 23) 강진(康津)의 서봉서원(瑞峰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옥봉집(玉峯集)』이 있다. 현재 그의 유묵(遺墨)이 지방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1981년 유물관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