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미(海美). 자는 대유(大裕), 호는 기봉(岐峯). 전라남도 장흥 출생. 아버지는 백세인(白世仁)이며 어머니는 광산 김씨로 첨정(僉正) 김광통(金廣通)의 딸이다. 아우 백광안(白光顔)과 백광훈(白光勳) 및 종제 백광성(白光城) 등 한 집안 4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칭송을 받았다.
1522년(중종 17) 전라도 장흥에 있는 사자산 아래의 기산(岐山)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태어난 곳의 ‘봉명재(鳳鳴齋)’라는 서당에서 수업을 하였고, 후에 시산(詩山, 지금의 태인)에 있던 이항(李恒)에게 가서 공부하였다. 이 무렵에 신잠(申潛)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철학을 논했다.
1549년(명종 4) 28세로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552년(명종 7)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홍문관정자로 임명되고, 1553년(명종 8) 시부회(時賦會)에서 장원하여 선시십권(選詩十卷)을 상으로 받고 호당(湖堂)에 뽑혔다. 그 뒤 1555년(명종 10) 봄에 평안도평사가 되어 관서지방의 절경과 생활상 · 자연풍물 등을 읊은 기행가사(紀行歌辭)인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었다.
이듬해 1556년(명종 11) 가을에 병이 들어 벼슬을 내놓고, 귀성하는 도중 음력 8월 전라북도 부안에서 35세의 나이로 객사하였다. 그는 천생자질이 뛰어나고, 뜻이 높아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며 행실이 올바른 성품이었다.
일찍이 김인후(金麟厚) · 이이(李珥) · 신잠(申潛) · 기대승(奇大升) · 임억령(林億齡) · 정철(鄭澈) · 양응정(梁應鼎) · 최경창(崔慶昌) 등과 같은 당시의 대문장가들과 도의로써 교유하였다.
1808년(순조 8) 기양사(岐陽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기봉집』이 있다. 1987년 11월 전국가비동호인회에서 묘가 있는 부산면 호계리 운치(雲峙)에 가비(歌碑)를 세웠다.
그의 「관서별곡」은 정철이 지은 가사 「관동별곡」보다 25년이나 앞서 지은 작품으로 기행가사의 효시가 되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된다. 「관서별곡」은 평안도평사의 벼슬을 제수 받고, 관서지방을 향해 출발하는 것부터 부임지를 순시하기까지의 기행 노정을 운치 있게 그려낸 것으로, 국문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