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는 굴원(屈原)의 초사체(楚辭體 : 중국 전국시대 중엽에 초나라에서 일어난 서정적 운문체)를 본뜬 운문체이다.
김종직이 1457년(세조 3)에 밀성(密城)에서 경산(京山)으로 가는 길에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다가 꿈에 의제(초나라 懷王)를 만났는데 여기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조문(弔文)을 지었다고 한다. 단종을 죽인 세조를 의제를 죽인 항우(項羽)에 비유해 세조를 은근히 비난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글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사초(史草)에 기록해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 충분을 은연중 나타냈다.”고 하였다. 또 사관 권경유(權京裕)·권오복(權五福)은 김종직의 전을 지어 사초에 싣고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 충의(忠義)를 분발하니 보는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라고 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성종실록』이 편찬될 때 당상관 이극돈(李克墩)이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에 삽입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라는 글이 세조의 찬위를 헐뜯은 것이라고 하여 총재관(總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고하였다. 그러나 어세겸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이를 유자광(柳子光)에게 고하였다.
유자광은 김종직과 사감이 있었고, 이극돈은 김일손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유자광은 이 사실을 세조의 총신(寵臣)이었던 노사신(盧思愼)에게 고해 그와 함께 왕에게 아뢰어 “김종직이 세조를 헐뜯은 것은 대역무도(大逆無道)”라고 주장하였다.
연산군이 유자광에게 김일손 등을 추국하게 하여 많은 유신들이 죽임을 당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된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