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2책. 필사본.
편자 미상. 편찬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8세기 초에 편찬된 듯하다.
‘계갑(癸甲)’의 ‘계’는 사단이 일어난 1703년(癸未)을, ‘갑’은 1704년(甲申)을 의미한다. 박세당은 1703년 『사서사변록』을 저술, 독자적인 견해를 밝혔다가 주자를 비판했다 하여 송시열(宋時烈) 계열의 서인들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이후 그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 도중에 죽었다. 그는 이보다 앞서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에서 송시열을 비방하여 송시열의 문인 및 서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1703년 초 『사서사변록』이 세상에 알려지자 성균관유생 179명의 연명상소를 발단으로 하여 박세당의 이단론(異端論)이 본격화되었다.
이 책은 이 때부터 1723년(경종 3) 박세당이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로 신원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제1책 상권에는 상소 및 계(啓) 등 24건이 실려 있다.
즉, 1703년 초 『사서사변록』이 세상에 알려진 후, 성균관유생 홍계적(洪啓迪)·홍계한(洪啓漢) 등 179명의 이름으로 박세당을 규탄한 상소문이 실려 있다.
이어 박세당의 제자인 이탄(李坦)·이익명(李翼明) 등이 스승을 변호하고 나선 것과 그 뒤 윤양래(尹陽來)·이여(李畲)·권상하(權尙夏)·최창대(崔昌大) 등이 서로 논란을 벌인 상소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제2책 하권에는 1703년 6월부터 올려진 상소문과 박세당에게 유배 등 조처를 내린 부계(府啓), 그 뒤 숙종이 신원을 허락하고 경종이 1723년 시호를 내린 사실까지의 상소·청대·차자(箚子), 그리고 시의(諡議) 등 26건을 수록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숙종이 훼경(毁經)·모성(侮聖)의 죄를 지었다 하여 박세당을 파직·출송한 일과 박세당이 유배 도중 죽고 난 뒤 민진후(閔鎭厚)가 왕의 청대에서 신원해 달라고 요구하여 숙종이 받아들인 일을 적고 있다.
그 뒤 1723년 박세당에게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박세당이 사문난적으로 몰린 전말 및 논의의 초점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노론·소론의 대립, 송시열 계열의 주자학 경향, 박세당 문인의 학문 태도를 살피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는 사료이다. 규장각도서에 있다.